최형선 프랑스파리미술협회 회원·사진작가

 

올해 레오나르도 다 빈치 서거 500주년을 맞았다. 그 어느 시기보다 2019년은 레오나르도에 대한 관심이 높다. 예술분야 뿐만 아니라 의학, 자연과학, 자동차 산업, 로봇 제작 분야 등 다양한 분야에서 그의 영향력이 살아 있다. 그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다. 지난 5월 2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세르조 마타렐라 이탈리아 대통령은 프랑스 앙브와즈에 있는 레오나르도의 무덤을 찾아 참배하고 꽃다발을 놓았다. 이탈리아 피렌체와 밀라노를 비롯한 프랑스, 영국 등에서 그를 기리는 전시회와 국제 심포지엄이 지난 3월부터 진행되고 있다.

레오나르도의 작품세계는 광활하고 독특하다. 1487년경, 레오나르도가 고전 라틴어를 모른다는 것을 빌미삼아 그가 다루는 작품의 주제들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것이라고 비난하는 이들에게 라틴어의 필요성보다는 실질적인 체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일부층에서만 애용되는 라틴어의 탁상공론에 반기를 들었다. 이미 피렌체의 위대한 화가로 떠오른 레오나르도는 스스로를 '문맹'이라고 칭하면서 자신에 대한 비난에 담담하게 응대했다. 하지만 밀라노의 루도비코(Ludovico Maria Sforza, 1452∼1508) 공을 위해 1480년에서 1490년까지 일하는 동안 문맹인 그는 화가, 발명가, 과학자, 음악가 등으로 '전문기사' 직위를 확고하게 굳히고 있었다.

사실 레오나르도가 자신을 문맹이라고 했을 당시는 혼외아들에 대한 대학교육이 금지되던 시기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밀라노의 실세들과 가깝게 연결되어 있는 지성적인 화가들에 대한 풍자적인 빈정거림이 나돌았다. 특히 그를 문맹이라고 비웃었던 밀라노 지식층들의 사고 방식은 여전히 이론과 기술사이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양분법에 그 기반을 두고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스스로 문맹이라 칭하면서 이러한 사회적 양분법과 지식층에 대해 확고한 반기를 들었다.

레오나르도는 이론과 기술, 상상과 현실적인 체험, 예술세계와 과학세계, 글과 그림 등 상반되는 요소들의 조화로운 융합을 추구했다.
그는 30세에 라틴어를 배웠다. 실제 서적을 구입하고 공부하기 시작한 시기는 피렌체를 떠나 밀라노에 정착할 때부터다. 아마도 자신의 생각이나 예술세계를 글로써 표현이 가능한 밀라노의 인본주의자, 시인, 철학가들과 어깨를 겨누기 위해서라 할 수 있다. 또한 이론과 실기의 병행이라는 생각을 실천했다는 시각이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이유는 세상을 알고자 하는 끊임없는 욕망에 있었을 것이다.

그는 1482년경부터 서서히 책을 구입하기 시작했다. 때로는 원하는 책을 사기 위해 몇 달치 급료를 투자했다. 1505년 '코덱스 마드리드 II'에 기록된 개인도서 목록을 살펴보면, 116권 정도였고 빌린 도서까지 포함하면 250권에 달했다고 한다. 인문 지식층에 비하면 보잘것 없는 수량였지만, 다른 예술가들과 비교하면 엄청난 규모였다. 다만 읽기 위한 시간적 여유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도서에 대한 관심은 글로써 가능성을 지닌 저자가 되고, 그의 예술과 연구들의 독자적인 우수성을 알게 했다. 창조하는 장인의 영역에서 사고하는 창작가의 영역으로 발전할 수 있기를 희망하는 바람이 여실히 보인다.

그는 글로 표현이 가능한 저자가 되기를 소망했다. 그리고 그가 남긴 방대한 분량의 노트들을 통해 충분히 표출됐다. 첫 번째 수사본은 20세에 쓴 것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그의 코덱스는 '코덱스 레이체스터', '코덱스 아틀란티쿠스', '프랑스의 수사본', '코덱스 트리뷸지아누스', '코덱스 유르비나스(회화론)', '코덱스 원즈', '코덱스 마드리드', '코덱스 포스터', '새들의 비행에 대한 코덱스', '아룬델 코덱스' 등 25개가 알려지고 있다. 언급한 코덱스들에 보관된 분량이 약 14만페이지 이상일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까지 알려진 분량은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레오나르도가 활동한 당시 그의 명성은 이미 유럽 전역에 알려졌었고 영향력도 컸다. 그의 첫 번째 일대기를 쓴 지오르지오 바자리는 미켈란젤로와 라파엘과 함께 예술의 최고봉에 올려 레오나르도 전설을 낳게 했다.
자연 현상에 던지는 끝없는 의문과 마침표를 향해 지칠 줄 몰랐던 그의 기질을 마치 마법과 손이라도 잡은 것처럼 언급했다. 제판 때 이 부분이 수정되어 동시대 사람들에게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완벽한 사람으로 여겨졌던 레오나르도의 명성에 흠이 되기도 했다.
최형선 작가는 프랑스 파리4대학교(소르본느)에서 알베르또 지아코메티를 연구해 미술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88∼90년 파리국립미술학교 판화과 초청학생 이후 파리에 장기간 머물다 최근 귀국하여 사진작가로 활동 중이다. 성신여자대, 홍익대에 출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