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환 논설위원

지난 주말 강원도의 홍천 은행나무숲에도 나들이 행렬이 몰렸다고 한다. 4만㎡ 대지에 2000여 그루의 은행나무가 열병식을 벌이는 듯하단다. 한 독림가(篤林家)의 30여 년 뚝심이 일궈낸 사유림이지만 무료 개방이다. 그 숲에 담긴 스토리텔링도 가을 여심(女心)을 흔드는 모양이다. 이 숲의 주인은 만성 소화불량에 시달리는 아내를 위해 1985년 이곳 산으로 들어왔다. 아내의 쾌유를 비는 마음을 담아 은행나무 한그루씩을 심어 나갔다고 한다. 누군가를 위해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 심어보지 못한 이들도 많은 세상 아닌가. ▶은행나무는 역사가 오래된 식물로 살아 있는 화석으로 꼽힌다.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등 주로 동아시아에 분포한다. 열매가 살구 모양인데 딱딱한 중간 과피가 은빛이어서 은빛살구(銀杏)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은행잎은 혈행 개선에 효험이 있다. 30여년 전 현 SK그룹 계열의 S제약이 은행잎을 원료로 한 혈행개선제를 내놓아 히트상품에 오르기도 했다. 은행나무는 암수가 따로 있다. 암나무는 인근 수나무에서 날아온 꽃가루를 받아 열매를 맺는다. 은행 열매의 바깥 과피가 터지면 고약한 냄새가 나고 피부에 염증을 일으킨다. 씨앗을 보존해 자손을 퍼뜨리기 위한 생존본능이다. 은행나무는 10년 이상 자라야 열매를 맺고 그제서야 암수를 구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수나무에만 있는 유전자를 찾아낸 덕분에 묘목도 암수 감별이 가능해졌다. ▶언제부턴가 이맘때면 은행나무 가로수가 민원의 표적이 된다. 냄새가 역해 보행에도, 영업에도 지장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예산을 들여 기발한 대응책을 내놓는다. 아예 암나무를 뽑아내고 수나무 은행이나 다른 나무를 심는 게 대표적이다. 열매가 익기도 전에 생으로 털어내기도 한다. 최근에는 '깔대기' 형태의 그물 구조물을 은행나무에 설치하기도 한다. 열매가 도로에 바로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다가 은행나무 정관수술까지 나올 판이다. ▶은행나무 입장에서는 참으로 호들갑스럽다 할 것이다. 늦가을 한철 잠깐의 악취일 뿐, 찬바람이 불면 언제 그랬나 싶은 정도인데도 말이다. 얼마전 프랑스의 한 지방법원에서 흥미로운 판결이 나왔다. "수탉 '모리스'는 시골에서 울 권리가 있다." 한 농가의 수탉이 아침마다 운다고 해서 이웃으로부터 소송을 당했던 것이다. "은행나무도 자손을 퍼뜨릴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식물보호단체는 어디 없나. 은행잎이 샛노랗게 물들고 은행 열매가 뒹굴어도 그냥 '가을이 가는구나' 할 수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