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전문도서관 '길위의 꿈'과 인천일보가 공동 주최한 '제2회 길위의 꿈 여행수필상 공모전'에서 몽골의 전통 사냥꾼 '베르쿠치'를 찾아 떠난 여정을 소개한 이진경의 <지금, 이곳의 삶에 머무는 법>이 대상을 차지했다.


심사를 맡은 장명진(소설가. 여행작가)씨는 "A4 9매에 이르는 긴 호흡의 작품이지만 주제의 집중력과 전개의 긴장감을 잃지 않는 점이 대단하고 문장 또한 상당히 단련되어 있다"면서 "독수리를 이용해 사냥을 하는 몽골의 전통 사냥꾼 '베르쿠치'를 찾아 떠난 여정을 한 편의 단편소설처럼 흥미롭게 펼쳐낸다. 여행수필이 지닐 수 있는 미덕을 두루 갖추고 있는 빼어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남창섭 기자 csnam@incheonilbo.com

 


 

이진경

꿈상(인천일보사장상) 당선작

 

                지금, 이곳의 삶에 머무는 법

 

 

 

 

 - 열흘간의 몽골 대초원 횡단기

그해 11월의 첫날, 몽골의 서부 '바양을기'에 있는 작은 비행장에서 나는 수첩을 잃어버렸다. 여행의 목적지인 서북단 국경지대에 있는 카자흐 부족 마을에 도착해 하룻밤을 묵고 다시 수도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열흘 전, 우리 일행은 울란바토르에서 차을 타고 출발해, 숙박 차 인근 소도시에 머문 저녁 이후 시간을 빼곤 내내 초원을 가로질러 달려왔던 것이다. 수첩엔 그 열흘간의 여정이 메모 형식의 일지로 기록돼 있었다. 초원의 끝에서 사라져버린 수첩 때문에 그 몽골여행은 한동안 내 안에 하나의 상실의 이미지로 남아 있었다. 이 글은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야 기억의 파편들로 뒤늦게 완성한 여행담이다. 

 

 

 

뜬금없이 맥락 없이 간절하게

'베르쿠치' 때문이었다. 
몽골 서쪽 국경지대에 가면 볼 수 있다는 독수리 사냥꾼! 정확히 말해, 베르쿠치는 화살이나 총을 쓰지 않고 독수리를 날려 보내 사냥을 하는 카자흐 부족 전통의 사냥꾼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영하 40도, 해발 3000미터 이상의 겨울 산 정상에서 베르쿠치는 고요한 설원을 지나는 여우를 발견하자 팔뚝에 앉아있던 독수리를 날려 보냈다. 독수리는 쏜 화살처럼 직선으로 하강해 단번에 여우 뒷덜미에 깊숙이 날카로운 부리를 박아 넣었다. 새하얀 설원에 선명하게 붉은 피가 흩뿌려졌다. 사냥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저기다! 저기 가자." 

그게 발단이었다. 딱히 용무가 없어도 습관처럼 한데 모여 시간을 죽이던 그 무렵, 우리가 함께 본 TV 다큐멘터리 한 편이 무슨 영감을 불러일으켰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분명한 건 우리 중 누구도 몇 달 후 우리가 정말 저기, 그 베르쿠치 마을에 가 있을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뜬금없고 맥락도 없는 막연한 바람은 어느 순간 이유도 없이 간절해졌다. 

2010년 10월 22일 자정. 우리 일행은 징기스칸 공항에 모였다. 일행이라 함은, 나를 포함해서 늦게까지 공부를 한다는 구실로 결혼도, 직업을 갖는 일도 무한정 유예키다 어느새 젊지도 늙지도 않은 어정쩡한 나이에 이른 여자 셋과 이 무모한 여행에 우연히 합류하게 된 초면의 남자 화가 둘(그들에겐 스케치 여행이란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 그리고 그 둘을 끌어들인 장본인이자 몇 해 전부터 울란바토르 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역시나 우리 여자 셋과 프로필이 비슷한 선배였다. 선배는 달랑 목적지만 통보하고 무작정 쳐들어갈 거라는 대책 없는 후배들 때문에 졸지에 현지에서 여행 준비 일체를 담당했으니, 공항에 마중 나와 준 것만으로 우린 감지덕지할 뿐이었다.

다음 날 출발에 앞서 몽골인 4명이 합류했다. 선배와 친분이 있는 초로의 여행사 대표 '바트'와 여행 내내 술고래처럼 코가 빨갛고 말 한 마디 없던 바트의 친구, 두 사람이 각각 일행이 나눠 탈 2대의 승합차를 몰고 나타났다. 그리고 초원의 서부가 고향이라 길 안내자로 불려온 '타우가', 한국에서 잠깐 유학 생활을 했다는 학생 한 명(이름을 까먹었다)이 통역으로 가세했다. 현지인이라고 해도 그들 역시 국경지대까지, 그것도 겨울 초원을 횡단해서 가는 일은 처음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일행 10명 모두에게 초행자였다. 그리고 앞으로 열흘간 우리가 가야할 여행코스는 관광지도 아니고, 그 어떤 문명의 이기도 기대할 수 없는 곳이었다. 겨울 몽골이 하도 춥다기에 준비랍시고 내복 두 벌을 챙겨온 게 전부였던 나는 처음으로 불안했다.  

 

 

초원에서 길을 잃지 않는 법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들이 총알을 장전하듯 울란바토르 시내에서 필요한 물품과 식료품을 쇼핑한 후에 우리는 출발했다. 시내를 통과하면서 도심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도로는 정비가 잘 돼있지 않았고, 번화가라는 백화점 근처 상가는 30년 전쯤의 서울의 남대문 같았다. 드문드문 보이는 허름한 아파트 건물에선 검은 연기가 솟아올라 우릴 놀라게 했다. 석탄 연료 때문이라고 했다. 그나마 그 모든 도시적 구조물도 러시아(몽골은 1920년대 러시아 영향력 하에 사회주의가 되었다가 90년대 초 자본주의로 전환했다.)가 남긴 유산이었다. 거리엔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았는데 활기차다기보다는 어딘가 어수선해보였다. 호객 행위. 인력시장에 몰려든 사람들, 곳곳에 글로벌 건설회사의 골조물과 입간판들... 수도이기 때문이겠지만 '초원과 유목의 나라, 몽골'에서 떠올렸던 이미지와는 너무 달랐다. 도시는 개발에 목말라 보였고 그만큼 허기져 보였다. 머지않아 이 거리에서 느껴지는 결핍과 혼란이 새로운 욕망의 용광로로 변하게 되면 이 도시도 급속히 변화해 갈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뿐 이방인인 우리에겐 당장 겨울 초원에서 살아남아 무사히 여행을 마치는 것만이 관심사였다.

어느새 포장도로가 끝나고 도시 외곽의 텃밭과 농가들마저 지나치자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며 전방으로 빛바랜 듯한 갈색 지표면이 끝없이 펼쳐졌다. 초원 중에서도 가장 건조하고 거칠다는 몽골의 초원, 스텝에 들어선 것이었다. 그지없이 맑고 파란 하늘과 맞닿은 지평선만이 우리의 시야를 가르는 유일한 선이었다.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시야에 아무런 장애물 없이 그토록 단순한 구도를 가지면서도 압도적으로 광활한 자연 공간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가슴이 뛸 줄이야. 어찌 됐든 초원에 오지 않으면 평생 보지 못할 광경임에는 틀림없었다.

지면이 고르지 않아 차가 출렁거렸지만 푹신한 쿠션을 밟고 지나가는 정도의 느낌뿐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차체가 조금 앞으로 쏠리자 시야의 넓은 하늘과 초원이 통째로 크게 기우뚱하고 흔들렸다. 그건 낯설고 기묘한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실로 지구의 표면을 밟고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 지구와 내가 한 몸이라는 느낌! 당연하지 않은가. 45억년 동안 인류는 강력한 중력으로 인해 먼 우주공간으로 튕겨나가지 않고 지구표면에 달라붙어 생존해온 존재다. 그 당연한 사실이 처음 알게 된 듯 기이했다.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그렇게 낯선 곳에 가서야 비로소 열리는 새로운 감각으로 시작되는 건지도 몰랐다.
  
사방으로 끝없이, 가도 가도 끝없이 넓은 초원은 푸른 빛 한 점 없이 메마른 갈색으로 황량했지만 햇빛과 공기의 흐름이 매순간 풍경의 느낌을 바꾸듯 쉼 없이 경이로운 대자연의 파노라마를 펼쳐놓았다. 아름답다는 말로는 부족한, 어떤 먹먹함이 우리를 한동안 침묵하게 했다. 10월 말, 바깥의 체감온도는 영하 20도. 그래도 차를 멈출 수밖에 없는 풍경 앞에서 일행은 저마다 재빨리 사진기를 들고 차 밖으로 나왔다. 감탄사를 연발하면서도 추위에 2분을 버티기가 힘들었다. 도대체 이 무지막지하게 광활하고 척박한 자연 풍경이 왜 아름다움으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문득 궁금해졌다.
 
  '이 넓은 초원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길을 찾아가는 걸까?' 

초원에는 이정표는커녕 나무 한 그루 없었다. 차도나 인도가 따로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도 차는 서쪽을 향해 초원을 곧장 가로지르지 않고 이리저리 방향을 틀어 가거나 크게 우회해 가곤 했다. 마치 몽골인에게만 보이는 차선이라도 있는 듯이. 몽골인들에겐 그들만의 방식으로 길을 보는 법이 있을 터였다. 그 광활하고, 어디나 한결같은 초원에서 길을 잃지 않게 해주는, 우리와 다른 초원에 대한 감각. 가령, 저 멀리 이동하는 형체를 보고 우리는 사람일 거라고 추측만 했다. 그때 타우가가 말했다. "여자" 몽골인들은 우리보다 훨씬 멀리 봤다. 실제로 평균 시력이 3.0이라고 통역이 말해주었다. 하지만 단지 시력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앞서 지나간 사람들의 자취를 참고하는 게 안전해요. 그들은 종종 뒤에 올 사람들을 위해 뭔가를 남겨놓기도 하지요. 타이어라든가... 초원 한복판에서 문제가 생기면 곤란하거든요."  

겨울 초원을 지나다 보면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른다. 우연이라도 다시 마주칠 일이 거의 없을 듯한 초원에서 몽골인들은 그런 방식으로 타인과 연결되어 있다는 의식에서 비롯된 자취들을 남긴다고 했다. 우리 역시 누군가 앞서 지나가며 만든 길을 따라 초원을 지나고 있는 셈이었다. 생각이 짧았다. 어쩌면 우리는 초원에서 보다도 복잡하게 만들어진 미로 같은 문명의 도시에서 더 많이 길을 잃는지도 몰랐다.   

 


행복도 불행도, 희망도 절망도 없이

하루 동안에도 초원 사이로 모래사막과 돌밭과, 난생 처음 보는 빛깔의 바위산 골짜기들을 지났다. 풍경 감상도 좋지만 몇 시간에 한번 씩은 엄폐물로 쓸 만한 지형지물이 나타나면 차를 세우고 몸 안에 쌓인 노폐물을 배설해야 했다. 그럴 땐 우아하게 "Nature calls me(화장실에 가고 싶다)."를 외치고 각자 대자연의 품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문명의 오랜 습관에서 생겨난 습성은 몸의 자연스런 생리 앞에선 하찮게 무너졌다. 비우고 나면 곧 배를 채우고 싶었고, 배를 채울 수만 있다면 물이 부족해서 종이로 대충 닦은 식기와 젓가락으로 식사를 하는 것도 개의치 않게 됐다.

운 좋게 유목민을 만나면 그나마 더 인간적인 식사를 할 수 있었다(몽골 땅은 남한의 15배, 인구는 3백만. 그 중 절반 이상이 수도에 살고, 나머지 일부가 다른 소도시와 마을, 그 나머지가 초원에 흩어져 유목생활을 하기 때문에 몽골에서도 유목민을 만나는 일은 생각처럼 흔한 일이 아니다). 그들의 이동 숙소인 '게르' 안에서 몸을 녹일 수 있었고, 사용료를  지불하면 중앙 난로에 음식을 데워먹을 수도 있었다. 식후엔 게르 안주인이 대접하는 수테(우유 차)를 맛볼 수 있었는데, 난생 처음 마셔보는 양의 젖은 그 맛보다도 냄새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양들. 양은 유목민들에겐 추위와 거친 자연에 견딜 수 있는 지방과 열량을 제공하는 주요 식량이자 가정을 이루게 하고, 평생의 삶을 유지시켜주는 수단이었다. 남편과 아이들이 양들을 몰고 하루 종일 초원에서 풀을 먹이는 동안 안주인은 집에서 일 년치 저장 음식들을 만들었다. 양 고기, 양 우유, 양 요쿠르트, 양 치즈...
 
초원에서의 삶은 단순하고 명료해 보였다. 언제든 이동하기 위해 삶의 모든 방편들을 최대한 간소화하고 단순화시키는 삶. 곁가지나 군더더기 없이 오직 생존과 삶의 연장에 맞춰진 듯한, 단조롭지만 본질적인 것만 남은 생활의 리듬과 양식... 머문 자리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 그들의 삶은 철저하게 현재의 삶의 순간들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았다. 그 심플함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소박함이나 미니멀리즘 같은 취향과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었다. 주어진 현실을 수용하고 환경에 맞는 생의 법칙에 순응하는 즉자적인 삶의 태도와 지혜의 산물이었다. 행복도 불행도, 희망도 절망도 그 생존의 법칙 앞에선 한낱 문명이 만들어낸 관념의 과잉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나는 그들의 거칠면서도 순박한, 그러나 표정이 쉽게 읽히지 않는, 무심함을 넘어 무상해 보이는 얼굴을 보며 어느새 곱씹고 있었다.

잠깐 동안의 온기와 따뜻한 식사를 마친 후 다시 차에 오르면 또 끝없는 초원의 시간이 이어졌다. 시종일관 시야를 가득 메운 하늘을 배경으로 해가 시시각각 초원을 다른 빛으로 물들이며 기울어가는 광경은 몇 시간씩 바라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았다. 우리는 매일 하루가 저물어 가는 모습을 남김없이 지켜보았고, 그럴 때면 머릿속에 하얗게 비워지고 그 자리에 눈앞의 대자연이 그려 보이는 지독한 아름다움을 어떻게도 피할 길 없다는 이상한 무력감이 스며들곤 했다.

마침내 해가 지고 초원에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면 그제야 초조함에 정신이 들었다. 초원이 어둠에 잠기기 전에 아이막(소도시)이나 솜(면)에 닿아야 했다. 숙소를 마련하고 다음날 먹을 음식과 물을 준비해야 하므로.

마침내 광활한 초원을 배경으로 멀리서 마을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하면 우리는 꿈에서 깨어난 듯 잠깐 동안 또 들뜬 상태가 되어 초원의 하루가 무사히 끝났음에 안도하곤 했다. 하루 종일 초원의 아름다움에 매혹당해 있었으면서도, 때론 그때 어둠 속에서 우리를 맞이하듯 반짝이던 그 불빛들과 마을에 도착해 사람 사는 기척을 접하고 나서야 비로소 밀려들던 안도감, 뒤이은 기분 좋은 피로감에 묻어오던 왠지 모를 저녁의 우수,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던지...   

 

 

알타이 설원을 넘다

우리는 추위에 익숙해졌고 최소한으로 씻었고, 도중에 차를 세우는 일도 줄어들었다. 오직 정해진 목적지만이 먼 곳에 서있는 등대처럼 머릿속에서 깜박거릴 뿐, 초원에선 몸도 생각도 점점 단순해져 갔다. 먹고, 자고, 일어나면 해가 질 때까지 초원을 달렸다. 그렇게 7일째, 우리는 고비-알타이 산악지대 북쪽 기슭에 접어들었다. 산을 넘으면 곧바로 국경지대였기에 여행의 팔부능선을 넘었다는 생각으로 긴장이 풀렸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여행의 진짜 고비가 눈앞에 기다리는 줄도 모른 채 우리는 동화 속 겨울나라처럼 눈부신 만년설원의 장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평원만 보고 내내 달려온 우리 눈에 눈 덮인 알타이 산악지대의 변화무쌍한 지형과 험준한 산세는 태고에 만들어진 자연의 뼈대 그 자체였다. 마침내 사방을 뒤덮은, 하얗다 못해 푸르스름해 보이기까지 한 눈 천지의 세계로 들어서자 숨 막히는 적막감이 우리를 감쌌다. 이따금 희미한 기척에 고개를 돌려보면 눈 비탈에서 야크와 염소, 양 몇 마리가 풀을 뜯고 있었다.

  "이런 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네."

우리는 홀린 듯 차 밖으로 나왔다. 아무도 밟지 않은 만년설원의 눈밭에 기어이 발자국을 남기고픈 욕망을 억제하기가 힘들었다. 아니 여행의 목적은 잠시 잊고 설산의 눈 속에 파묻혀 하루를 고스란히 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바트는 바퀴에 체인을 묶은 승합차를 거북이걸음 속도로 몰고 우리를 뒤따라왔다. 처음엔 그런 줄만 알았다. 그런데 곧 차를 멈추고 내리더니 눈 밑의 땅을 다지듯 꾹꾹 발로 밟으며 앞으로 열 걸음을 걸어 나갔다가 되돌아서 다시 차에 오르며 뒤차에 뭔가 신호를 보냈다. 바짝 긴장한 그의 얼굴을 보고서야 우리는 알았다.
 
평원이 아니라 산악지대였다. 눈과 얼음에 가려진 산길을 타고 넘어가려면 수없이 차에서 내려서 전방의 땅 밑 사정을 확인하고 나아가야 했다. 게다가 눈사태도 염려해야 했다. 차는 느린 속도로 2미터도 채 나가지 못하고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차라리 걷는 게 더 빨랐다.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눈 더미에 발이 빠져 균형을 잡기 힘들었다. 여행을 온 건지 고행을 하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그렇게 간신히 고개를 넘자 눈앞의 광활한 초원 끝에서 광풍을 동반한 칼바람이 몰아쳐 왔다. 앞으로 나아가는데도 몸이 자꾸 뒤로 밀렸다. 얼어붙은 뺨이 칼에 베이듯 따가웠다. 나는 생각했다. 

  '이게 마지막 고비겠지? 다음 고비가 또 있을까?'

몽골 여행은 도망치기 위한 구실이었다. 언제나 그랬다. 삶이 뜻대로 풀리지 않고 나 스스로에게 실망할 때마다 나는 도망쳤다. 그러는 사이에 제자리걸음에 실망스럽던 내 삶은 어느새 균형과 방향마저도 잃고 후퇴하고 있었다. 단지 나는 그런 현실을 직면하지 않으려 했다. 도망칠 곳이 아직 남아 있다고, 애써 삶의 에너지를 탕진할 구실을 찾았다. 하지만 초원에서 닥치는 매순간의 고비는 피할 길이 없었다. 정면으로 마주하고 곧바로 뚫고 나가눈 수밖에. 그런 단순함과 즉각적인 단호함이 역으로 내가 뒤로 미룬 숙제들, 피하려 했던 삶의 고비들을 생각나게 했다. 삶에는 도망친다고 해도 숨을 곳이 없었다. 그 자명한 사실을 꼭 이 먼 곳까지 와서 새삼 깨달아야 했었나 싶었지만 그래도 한 가지 분명한 맥락은 찾으려 애썼다. 초원에서의 이 뜻 모를 방황을 마치고 돌아가면 꼭 가능하길 바랐다. 가차 없이, 단순명쾌하게,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삶 말이다. 

 


마음의 초원이 가르쳐 준 지금, 이곳의 삶

밤늦게 고원의 땅끝 마을 '체첵(꽃이라는 뜻)'에 도착했다. 마을의 발전기를 돌려 얻은 한 시간 분량의 전기를 남은 여정을 준비하는 데 쓰고 마을 회관에서 몽골 음식 반, 우리에게 남은 음식 반을 차려놓고 주민 몇 명과 촛불 아래에서 저녁을 먹었다. 초원에서의 마지막 만찬이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주민들의 강력한 권유로 마을 강당에서 아크로바틱 공연을 관람해야 했다. 그 공연이 외지 손님들을 대상으로 한 마을의 대표 관광 상품이란 걸 우리는 뒤늦게 알았다. 솔직히 말하면 끝까지 보기 힘든 공연이었다. 강당은 난방시설이 없어 하얀 입김이 보일 만큼 추웠고, 조명시설도 음악도 없었다. 입술이 파랗게 질린 아이들은 기껏해야 6살에서 9살? 모두 맨살이 드러난 얇은 체조복을 입고 작고 가녀린 몸을 파르르 떨면서 위태롭게 펼치는, 엉성하기 짝이 없지만 애처롭고 '웃픈(웃기면서 슬픈)' 공연이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공연이 무사히 끝났을 때 우리 일행은 왠지 모르게 힘껏 박수를 쳤고, 말이 나오기 전에 최소한의 여행 경비만 남기고 있는 돈을 모두 모아 공연비를 지불했다. 예정에 없던 지출이었지만 우리는 그게 몽골의 '에누리 없는' 현주소임을 수긍했다. 그들에게 어쩌다 한번 찾아오는 외지인은 반가운 마을 손님이기 이전에 수익을 올릴 기회였다. 대가 없는 친절과 도움은 과거의 미덕일 뿐. 태고의 산간벽지에 사는 몽골인들에게도 그렇게 바깥세상의 셈법은 당연한 현실이 돼있었다. 아무렴, 세상은 끊임없이 다른 꿈을 꾸라고, 다른 삶이 가능하다고 부추기는데, 그들만은 거친 자연에 순응하며 수천 년간 이어온 유목의 삶을, 과거의 힘겨운 방식을 고수하길 바랄 순 없는 일 아닌가.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이 있다면 몽골인들은 현재의 삶의 방식을 버리고 기꺼이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음을 우리는 이미 수도인 울란바토르에서도, 초원에서도 경험한 터였다. 체첵을 떠날 때 마을의 한 젊은 일군은 마지막까지 우리를 배웅하며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언젠가 우리도 한국에 가서 공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돌아가면 부디 이곳에 대해 인터넷 카페나 블로그 같은 데 글을 올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얼마 후, 드디어, 우리는 여행의 종착지인 초원의 끝, 국경지대 카자흐 부족이 사는 마을에 도착했다. 9박 10일간의 대장정이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감격도, 허탈감마저도 없었다. 이상하게 무덤덤했던 그날 그곳에서의 하루는 의외로 밋밋했다.

우리는 애초 만나려 했던 TV 다큐멘터리 속 늙은 베르쿠치를 찾을 수 없었다. 우리가 실망하지 않은 건 어차피 아무런 사전 준비 없이 무턱대고 찾아간 여정이었고, 그런 이상 실제로 베르쿠치를 만나리라 진지하게 기대한 사람은 사실상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베르쿠치로 활동한다는 젊은 카자흐 인의 집을 소개받아 방문했다. 그는 우리에게 독수리 사냥으로 잡은 여우의 가죽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알게 되었다. 우리가 만나고 싶어 했던 베르쿠치는 이제 없다는 사실을.

  "옛날처럼 겨울에 사냥만해서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에 진짜 베르쿠치는 이제 없다. 지금은 겨울 사냥축제에서 관광객들을 상대로 독수리사냥을 시연할 뿐이다. 요즘은 사냥할 때 다들 총을 쓴다."

젊은 베르쿠치는 대화를 마치고 나서 축제 때 자신과 함께 나가는 사냥꾼 독수리를 보여주었다. 우리는 실제 사냥 대신 들판에 먹잇감으로 멀리 던져 놓은 고깃덩어리를 독수리가 날렵하게 채가는 장면으로 만족해야 했다. 울란바토르에서, 체첵에서 이미 본 몽골이었기에 실망도 허탈감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초원을 지나는 동안 누구도 우리 여행의 종착지에 대해 얘기를 나누지 않았다. 우리는 점점 단순해졌고 순간순간에 집중했다. 초원이 그렇게 만들었다. 때론 충실한 과정만으로 충분할 때가 있다는 걸 오랜만에 느꼈다.

그리고 그 밤, 젊은 베르쿠치의 집에 묵으면서 한밤중 잠에서 깨어 창문을 열었을 때 품안으로 쏟아져 내릴 듯 다가서던, 초등학교 시절 북두칠성, 큰 곰, 작은 곰, 염소, 사자, 물고기 하며 외우던 바로 그 별자리들을 보았다. 초원의 끝에서 천상이 아닌 지상의 것처럼 손에 잡힐 듯 총총히 빛나던 그 밤하늘의 별들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하고, 또 충만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도 한동안 나는 상실감에 젖어 있었다. 몽골의 광활한 초원이 매순간 펼쳐 보이는 그림 같은 풍광 앞에서도 나는 카메라 대신 수첩과 펜을 들어 까먹기 전에 앞서 지나간 모든 것들을 기록하려 애썼다. 낯선 곳에서의 시간들을 글자로 봉인해 기념품처럼 가져가려는 듯이, 그게 여행에서 얻을 최고의 소득이라는 듯이, 마치 거기에 내 삶을 리셋해 줄 신묘한 비법이라도 담겨 있다는 듯이. 하지만 그 기록들은 초원에서 사라졌고, 나는 돌아온 후 뒤늦게 그 상실을 스스로 메우는 법을 깨달았다. 그날 새로 산 수첩에 나는 이렇게 적었다.

  '초원에서의 시간들은 초원에 남겨두고, 지금 이곳에서의 삶을 살자. 익숙한 것들을 다르게 바라보고 지금, 여기에 새롭게 집중하자. 초원은 우리 마음속에도 있으니, 그곳에도 햇빛과 바람과 별은 매일 찾아와 새로운 날의 문을 두드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