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물밀물] 노동자는 인천의 근간
[썰물밀물] 노동자는 인천의 근간
  • 이문일
  • 승인 2019.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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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일 논설위원

어릴 적 주안염전은 놀이터였다. 여름철엔 소금밭을 일구려고 만든 큼직한 저수지에서 수영과 낚시 등을 즐겼다. 인천교 아래를 지나 지금의 동암역 부근까지 길게 뻗은 갯벌에서 갯지렁이를 잡아 망둥어 낚시를 하면서 시름을 잊었다. 갯벌엔 칠게도 지천이어서, 잡고 놀다 보면 하루 해가 금방 저물었다. 때론 염전 주위에 소금을 옮기려고 깔아놓은 좁은 레일 위 '소금차'를 염부 몰래 타고 흥겨워했다. 짠물에 얼룩진 몸이 새카맣게 그을렸던 기억이 새롭다.

주안 일대엔 이런 염전 저수지 3곳이 있었다. 저수지는 4·6·7구로 불렸다. 6·7구의 경우 수심이 깊어 수영을 잘하는 어른들조차 꺼렸다. 해마다 익사를 당하는 사고도 끊이지 않았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그곳에선 놀지 말라며 철저히 단속을 했다. 하나 현 동암역 근처에 있었던 4구는 달랐다. 수심이 얕아 누구나 즐기기에 좋았다. 그래서 여름철이면 피서 인파로 바글바글했다. 경인선을 타고 멀리 서울 쪽에서 오는 이도 많았다. 덩달아 갖가지 음식과 아이스케키 등을 파는 장사꾼도 흥을 곁들였다.


이랬던 주안염전이 수명을 다한 때는 1967년 무렵이다. 일제가 조선의 물자를 수탈하려고 1907년 주안 일대에 국내 첫 천일염전을 만든 뒤 60여년 만이었다. 염전 주변 야산을 뭉개는 불도저 굉음소리와 함께 주안염전은 메워지며 사라져갔다. 그리고 거기엔 국내 최초의 공단이 들어섰다. 현 미추홀구 주안동과 서구 가좌동에 걸쳐 있는 주안국가산업단지(1969년 8월 지정)는 그렇게 생겨났다. 한국전쟁 후 피폐했던 우리나라에서 첫 공업화를 이루고 수출상품을 만들었던 현장인 셈이다. 물론 개항(1883년) 이후 '기회의 땅'으로 불렸던 인천이 산업화에 대한 '역사적 경험'을 갖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래도 당시 인천과 국가의 성장을 이룬 공단 노동자들의 삶은 아주 열악했다. 일제강점기 때와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노동자들의 투쟁이 계속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인천시립박물관이 이를 기억·기록하기 위해 국립민속박물관과 공동으로 '노동자의 삶, 굴뚝에서 핀 잿빛꽃' 특별전을 열고 있다. 지난 8일부터 내년 2월16일까지 이어진다. 애환을 함께한 굴곡진 노동자의 삶을 톺아보는 전시다. 인천과 한국 경제는 어떻게 발전했는가. 경제 발전 뒤엔 노동자들의 피·땀·눈물이 온전히 배어 있음을 특별전은 알려준다. 숱한 우여곡절을 거치며 그 바탕 위에 선 노동자의 삶. 그게 바로 '인천의 민속이고, 민속문화'라는 민속박물관 학예사 말처럼 노동자들이야 말로 오늘 300만 인천의 토대다. 아무튼 대한민국 노동의 근간인 인천을 재조명해 널리 알렸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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