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본 인천미술인

〈22〉 小石 심현삼

1941 인천시 서구 백석동 출생

1959 인천 창영초등학교, 인천중·   고 졸업

1963 서울대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1973 뉴욕 브루클린 뮤지엄 오브    아트 수학

1974 아틀랜틱갤러리 작품전(뉴욕)

1981 동국대 대학원 사학과 졸업

1982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작가

1987 서예 개인전(백악미술관)

1988 프랫 미술대학 객원교수

1989 판화개인전(프랫히긴스 홀),    대한민국서예대전 심사위원

1990 판화개인전(동산방 화랑초대)

1991 대한민국서예대전 운영위원

1992 서양화 개인전(유나화랑 초대)

1995 서양화 개인전(인천 한서화랑)

현재 동덕여대 회화과 교수, 박물관장해방이후 현대적인 조형정신과 주체적인 회화양식의 정립에 따른 왜색의 탈피와 전통에 어떻게 현대적 문맥을 가미할 것인가의 문제는 한국화단의 가장 큰 숙제이자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였다.

 60년대를 전후하여 전통회화의 계승과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수묵산수를 현대화하고자 하는 시도가 대두되는 한편, 중견작가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조형이념을 추구·실험하는 경향 또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런 격동의 와중에 미술대학을 다니던 심현삼은 새롭게 유입되는 제2차 모더니즘의 열풍과 전통의 서구식 조형어법, 그리고 그가 스승 검여 유희강(본보 8월 7일자 참조)에게 습득하고 있는 동양의 서예를 어떻게 접목하여 자기화시킬 것인가 고민하고 있었다. 사실 이 문제는 아직까지도 심현삼(沈鉉三·59)교수를 번민케하는 필생의 고민거리이자 선결 문제이기도 하다.

 심현삼은 1941년 인천시 서구 백석동에서 심용기(沈庸基)씨의 6남매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미술에 남다른 재능이 있던 심현삼은 이미 대학시절부터 국전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대학 3학년때인 1961년 국전 서양화부에 출품하여 신인예술상을 수상한 그는 이듬해 국전에서는 서예와 서양화 부문에 동반입선하는 기염을 토한다. 이어 ROTC 1기로 군에 입대하게 된 심현삼은 1963, 1964년 국전에 연이어 특선하는 등 젊은 화가로서의 입지를 굳혀나간다.

 심현삼은 제대후 TBC에 입사하여 TV 프로그램 편집일을 하면서 창작미협전에 꾸준히 출품하는 등 작가로서의 책무를 고수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평생의 목표를 미술창작에 두고 있던 심현삼에게 있어 마치 기능인과 같은 직장생활은 견디기 힘든 일이었고, 결국 그는 직장을 그만두고 미국유학의 길에 오르게 된다.

 뉴욕의 브루클린 미술관에서 현대회화에 대하여 공부한 그는 추상회화와 서예의 정신적, 형식적 유사성에 주목하고 그가 익혀온 서예의 바탕을 현대회화에 접목시키기 시작한다. 이는 물론 그의 서예적 재능을 발견한 미국인 교수들의 조언에 기반한 것이었다. 이때 그는 이러한 그림으로 아틸랜틱 갤러리 초대전을 갖기도 한다.

 1970년대 후반 일단 귀국한 심현삼은(이미 검여가 병상에 있었기 때문에) 여초 김응현을 찾아가 서예를 다시 익히기 시작하는데, 이는 전통과 현대를 어떻게 접목하여 체질화시킬 것인가에 대한 필생의 목표에 대한 실천적 의미를 가지는 행동이었다. 여초는 당시 심현삼의 작품세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소석은 회화를 전공한 화가로서 서법의 묘에 이끌려 근 20여년의 정진으로 가위 서화겸전(書畵兼全)의 경지를 열었다고 하겠다. 회화에는 동서의 현격한 수이(殊異)가 있으나 서화동원(書畵同源)의 원리에 비춘다면 그들도 다른 것이 없다…. 그리하여 그는 더욱 깊은 오묘를 체득할수 있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심현삼의 그림은 서예를 모르는 화가와는 달리 서법의 진수를 깨달아 단지 대상을 묘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림을 기운 생동의 경지로 이끌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무렵 심현삼은 화가보다는 서예가로서의 활동이 두드러지고 있다. 상명여대와 추계예술대학에 출강하면서 한중교류전 등에 참여하는 한편 국전초대작가, 국제서도연맹 한국본부이사, 한국서가협회 상임위원, 한국서법학회이사 등을 역임하며 중견 서예가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굳히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동국대 대학원 사학과에 입학한다. 이는 그가 이미 어릴 때부터 서예와 함께 한학을 익혀왔고, 그런 가운데서 인문학과 미술을 겸함으로써 보다 차원높은 예술을 이끌어 낼수 있다는 생각에 따른 것이었다.

사실 심현삼교수의 지적·예술적 편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화가이자 서예가, 사학자, 박물관학자, 또 판화가로 고도의 전문성을 발휘하는 심교수의 재능은 그의 말대로 99% 노력에 의한 결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나머지 1%인 천부적 재능이 더더욱 중요하며 그것이 예술가에게 있어 생명이자 핵이라고 말한다.

이런 와중에 돌연 그는 1988년 뉴욕의 프랫(pratt)미술대학의 교환교수로 또다시 떠난다. 창작과 연구활동을 병행하는 가운데 그는 그곳에서 판화를 연구하는데, 50 가까운 나이에 새로운 기법에 관심을 갖는 점도 놀랍거니와 페인팅은 어깨너머로 습득할수 있지만 판화는 배워야 하는 것이므로 판화를 연구했다는 그의 인문정신은 후배들이 새겨들어야 할 행동이라고 생각된다. 이 성과를 바탕으로 그는 1989년 프랫 히긴스 홀(Pratt Higgins Hall)에서 「서예적 판화」 전시회를 열어 호평을 받는다. 프랫 건축대학 부학장인 시드니 엠 쉘로브(Sidney M Shelov)의 말을 들어보자.

 『여러해동안 나는 이곳 프랫에서 대학원 과정을 마친 많은 학생들의 작품전을 보아왔다. 그러므로 최초로 심현삼의 작품전에서 보았던 특징을 인정하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다. 나는 뉴욕의 화랑에서조차도 그의 작품에서 발견한 것처럼 이렇게 프로페셔널하고 감각적이면서도 서예적 의미가 충만한 판화를 본 바 없다. 건축과 미술이 관계하는 것이 뜻있는 것인 바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가 보여준 창작적인 감명과 장인정신을 공감한다.』

 이때의 전시에 대하여 프랫 미술대학 대학원 교수인 월터 로갈스키(Walter Rogalski)와 프랫 미술대학장인 멜 알렉슨버그(Mel Alexenberg) 등도 이구동성으로 옛 것에 새 것을 훌륭히 접목시킨 그의 창조정신을 높이 평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989년에 동산방에서 있었던 귀국전 팸플릿을 보면 그는 프랫 미술대학에서 리소그래프, 인타글리오, 에칭, 세리그라프 등 온갖 판화기법을 완벽하게 익혀 그것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조형화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모더니즘을 소화하지도 못한채 포스트모니즘 운운하고 있을 때 심현삼은 모더니즘의 이론적 한계를 오랫동안 구도적 자세로 닦아온 서법예술의 심오한 이치와 인간의 본질적 존재 그 자체로서 표상하는 서법 정신을 가지고 극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1995년 심현삼은 인천 한서화랑에서 서양화 개인전을 열었다. 「인천 현대미술 초대전」, 「인천시 초대전」 등에는 꾸준히 출품해 왔으나 고향에서 갖는 서양화 개인전은 남다른 감회와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이때 그는 프랫에서 연구한 판화작품과 캔버스작업을 선보였는데 특히 캔버스작업은 콜라주와 페인팅이 적절히 조화된 수준높은 작품들이었다.

 특이한 것은 거의 원시적이라 할수 있을 정도의 화려한 원색의 사용과 함께 드러날 듯 말듯한 형태들은 자칫 설명적으로 보일수 있는 화면을 초개념적 상상력의 세계로 인도해주는 현대적 개념의 그림들이었다. 이는 무색 또는 단색으로 이야기 될 수 있는 서예의 세계를 역설적 형식으로 보여줄 수 있는 그의 또다른 감각의 발현이었던 것이다.

〈이경모·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