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조선, 실학을 독하다] 6. 고산자 김정호 - (3) '대동여지도'는 진실로 보배이다
[아! 조선, 실학을 독하다] 6. 고산자 김정호 - (3) '대동여지도'는 진실로 보배이다
  • 여승철
  • 승인 2019.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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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까지도 … 그 정밀함은 따라올 자 없어
▲ <대동여지도> 각종 기호표./출처=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
▲ <대동여지도> 각종 기호표./출처=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

 

▲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은 인하대학교와 서울교육대학교에서 강의하며 고전을 읽고 글을 쓰는 고전독작가이다.
▲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은 인하대학교와 서울교육대학교에서 강의하며 고전을 읽고 글을 쓰는 고전독작가이다.

 

이제 몇 남은 기록들로 선생의 삶을 추적해 보겠다. '청구도'에 대한 기록은 오주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지지변증설'에 보인다. 이규경은 '근자에 김정호가 <해동여지도> 두 권을 만들었는데 바둑판 모양이고 자호(字號)에 따라 볼 수 있도록 하였다. 그 정밀함이 이전에 만든 사람들의 작품보다 훨씬 훌륭하다'고 하였다.

여기서 이규경이 말하는 <해동여지도>는 지도의 설명으로 미루어 보아 '청구도(靑邱圖)'를 지칭한 듯하다. 또 같은 글에서 '<방여고(方輿考)>20권을 저술하였는데 <동국여지승람>에서 시문(詩文)을 제거하고 빠지고 생략한 것을 보충하였다'고도 하였다. 연구 결과 이 <방여고>는 현재 영남대학교 소장본 <동여도지(東輿圖志)>로 밝혀졌다.


그런데 이러한 지도를 만들게 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위당(威堂) 신헌(申櫶, 1810~1884)이다. 신헌은 무신의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정약용·김정희 등과 교류하며 실사구시 학문을 추구한 사람이다. 그는 1862년 통제사, 1864년에 형조·병조·공조 판서를 지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의 염창(鹽倉)을 수비, 난이 끝난 후 조참찬 겸 훈련대장을 지내고 수뢰포(水雷砲)를 제작한 공으로 가자(加資)되기도 하였다.

1868년 어영대장, 공조 판서를 역임, 1875년 운양호 사건이 일어나자 이듬해 판중추부사로서 일본의 구로다(黑田淸隆)와 강화에서 병자수호조약을, 1882년 경리통리기무아문사(經理統理機務衙門事)로 미국의 슈펠트와 조미수호조약을 각각 체결하였고 이해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가 되었다.

이런 이력으로 보아 신헌은 매우 국방과 외교에 밝았다. 당연히 지리에 대한 이해가 있었고 선생과 가까운 사이라는 게 설득력 있다. 실질적으로 선생이 대동여지도를 제작할 때 참고자료의 수집과 고증을 해주었을 정도로 지리학에 대한 식견도 상당하였다. 또 관리였기에 국가 창고나, 비변사 등에 있는 지도를 열람하거나 빌릴 수도 있었을 것이고 이를 선생에게 보여주었을 것도 추론케 한다.
아래는 신헌의 '대동방여도서(大東方輿圖序)'(<금당초고(琴堂初稿)>) 내용이다.

나는 일찍이 우리나라 지도에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비변사나 규장각에 있는 지도나 옛날 집에 좀먹다 남은 지도 등을 널리 수집하여 증거로 삼고 여러 지도를 서로 대조하고 여러 지리지 따위를 참조하여 하나의 완벽한 지도를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이 작업을 김군백원(金君百源)에게 위촉하여 완성하였다.

그런데 위 글에서 맨 마지막 구절을 유념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이 작업을 김백원에게 부탁하여 완성하였다.(因謀金君百源 屬以成之)"라 하였다. 신헌은 선생을 '김군백원'이라고 하였다. 분명 연령적으로는 신헌은 김정호보다 7~8세 아래이다. 그런데 '김군'이라 호칭하였다. 선생의 신분이 양반이 아님을 추측케 하는 어휘임이 분명하다. 같은 신분이라면 '김공' 정도로 호칭한다.
이제 유재건의 <이향견문록>권8, <서화(書畵)>에 수록된 '김고산정호(金古山正浩)'를 본다.

김정호는 스스로 호를 고산자라 하였다. 본디 공교한 재주가 많고 여지(輿地,지구 또는 대지)에 관한한 학문에 벽이 있어 널리 살피고 수집하여 일찍이 '지구도'를 만들고 또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 그림을 잘 그리고 또 판각도 잘하여 인쇄하여 세상에 펴냈는데 상세하고 정밀하기가 고금에 견줄만한 것이 없었다. 내가 그 한 부를 얻었는데 진실로 보배로 삼을 만하다. 또 <동국여지고> 10권을 편집하였는데 미처 탈고하지 못한 채 몰(沒)하였다. 매우 슬픈 일이다. (<겸산필기> 중에서)

유재건은 '선생이 만든 지도를 소장하고 있으며 선생의 지도에 대한 학문적 관심과 상세하고 정밀하여 진실로 보배'라고 극찬하고 있다. 유재건의 <이향견문록>의 서문을 조희룡이 썼는데 이 해가 1862년이다. <겸산필기>는 인용 서목인데 이 역시 유재건이 지었으나 남아 있지 않아 출간 년도를 알 수 없다. 선생이 1866년까지는 생존하였기에 유재건이 <이향견문록>을 후일 증보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열 권의 <동국여지고> 운운은 <대동지지> 32권이 아닌가 한다.

선생의 <대동여지도>는 위에서 살핀 여러 경우의 수와 이전에 있었던 농포자(農圃子) 정상기(鄭尙驥, 1678~1752)와 같은 지도 제작자들에 힘입어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물론 선생이 이 지도 제작 과정에서 여러 곳을 직접 가보고 한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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