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석 경기본사 사회부장

 

경찰의 끈질긴 수사가 빛을 냈다. 모두 화성연쇄살인 사건의 용의자가 어느 날 불쑥 특정되리라는 사실은 짐작도 못했다.
33년 만에 이 잔인한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가 정체를 드러냈다. 포기를 몰랐던 경찰, 사건을 잊지 않고 해결을 원했던 국민 모두의 바람이었다.
화성사건 피해자들의 유류품에서 그의 DNA가 나왔다. 사건과 반드시 관련이 있다는 명백한 증거다. 그를 특정한지 2주가 지났지만 추가 증거는 나오지 않고 있다. 자백이 전부다. 쉽게 입을 열 것 같지 않았던 그가 화성사건을 포함해 40여건의 강력사건을 저질렀다고 순순히 실토했다. 아예 모방범죄로 결론 내려진 8차 사건도 자기가 한 일이라고도 했다. 8차 사건의 범인은 무기수로 20년을 복역하고 가석방된 인물이다. 그의 말이 맞다면 애먼 사람이 누명을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의 말에 진실성이 흔들리는 대목이다.

그와의 진실게임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33년의 흔적을 더듬으며 그의 말을 하나하나 확인하기란 여간 쉽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공범을 찾아 퍼즐을 맞추는 것이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
그를 용의자로 화성사건 중심에 두면 다른 용의자가 등장한다. 그와 공범일 개연성이 매우 높다. 그와 일면식이 없다면 제3의 인물이다. 경찰이 처음 그를 특정하면서 밝힌 DNA는 5·7·9차에서 나왔다. 그런데 경찰은 DNA가 검출됐다고만 밝혔고 어떤 증거물에 나왔는지 등은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 부분을 계속 함구하면서 '말 못할 사정이라도 있나'라는 의문마저 든다.

경찰은 지난 7월 10차 사건부터 순차적으로 국과수에 증거물 분석을 의뢰했다. 주로 피해자들의 옷가지 등이었다. 5차 증거물에서는 옷과 속옷 모두에서 나온 그의 정액(정자 세포)으로 DNA를 분석했다. 또 7차와 9차 증거물에서는 그의 피부 조직을 찾아냈다. 두 피해자 속옷에서 땀과 함께 묻은 피부 표피세포가 나온 것이다. DNA 감정 결과 모두 그의 것이었다. 이를 근거로 경찰은 그를 특정한 것이다.
하지만 증거물에서 그의 것만 나온 것은 아니다.
9차 증거물을 1990년 11월15일 처음 감정한 최상규 전 국과수 유전자분석과장은 두 곳에 묻은 정액에서 'B'형을 찾아냈다. 용의자 정액이 묻은 9차 증거물은 블라우스와 교복 상의 2점이다. 모두 B형의 정액이 지름 5㎝, 2㎝ 크기로 검출됐다.

경찰은 이번 국과수에 이들 증거물은 의뢰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9차 증거물에서는 그와 다른 B형 두 명이 존재한다는 과학적 결론에 도달한다. 즉 공범일 개연성이 매우 높다. 다른 경우라면 용의자가 범죄 현장을 떠난 뒤 다른 이가 현장에 들러 몹쓸 짓을 한 뒤 흔적을 남겼다는 이야기가 된다.
화성사건의 용의자가 복수일 것이라는 과학적 증거는 또 있다. 경찰도 복수의 용의자를 염두하고 수사해왔다.
10차 사건이후 경찰은 1991년 5월23일 일본 경찰수사과학연구소로부터 한 통의 감정결과를 받았다. 9차 사건 옷가지와 10차 사건 양말 등에서 검출된 정액의 유전인자(DNA) 지문감식에서 다른 사람이라는 의견이었다. 언론도 이를 근거로 범인이 최소 2명 이상이라고 보도했다. 한 달 후인 그해 6월 경찰은 강간 등 전과기록이 있던 20대 용의자 2명을 특정하기도 했다.

1986년 10월 2차사건 현장 주변에서 빈 우유갑 2개가 발견됐고, 시신을 농수로 옮긴 점 등을 미뤄 경찰은 사건 초기부터 공범 존재 가능성을 열어두기도 했다.
경찰은 공소시효가 완성됐지만 사건의 실체를 밝혀내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인다. 배용주 경기남부경찰청장은 '천우신조(天佑神助)'라 정의했다. 그는 "참혹하게 당한 피해자들의 사건 기록을 보면서 억장이 무너졌는데, 하늘이 이 사건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돕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배 청장은 "억울한 피해자 원혼 달래 줄 책무 맡았고 역사적 진실을 반드시 밝히겠다"고 강조했다.

33년 만에 특정된 그의 자백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복수의 용의자가 존재한다는 과학적 진실 역시 중요하다. 눈부신 발전을 거듭한 과학수사 기법을 통해 공범을 먼저 찾는 노력이야말로 혹여 '그놈들'이 저지른 모든 사건의 진실에 다가가는 지름길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