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혜욱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사회적으로 주목받을만한 사건이 발생하면 수사기관은 피의사실을 발표하고, 언론이 이를 보도하는 형태로 피의사실이 공개된다. 특히 주요 대기업 총수, 정치인, 연예인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면 기소되기 전까지 피의사실이 수많은 언론을 통해 보도된다. 피의사실은 수사기관이 자의적인 브리핑을 통해 발표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피의사실은 '(익명의) 검찰관계자에 따르면'이라는 문장이 포함돼 언론을 통해 공개된다. 이는 수사기관이 피의사실을 언론에 제공하고 언론은 이를 그대로 받아 쓴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피의사실공표 행위는 무죄추정의 원칙에 반한다. 헌법 제27조 제4항은 "형사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무죄추정의 원칙은 형사절차와 관련해 피의자는 물론 피고인에 대해서도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원칙적으로 죄가 없는 자로 다뤄져야 하고 그 불이익은 필요최소한에 그쳐야 한다는 원칙이다.

이 원칙은 인간의 존엄성을 기본권질서의 중심으로 보장하고 있는 헌법질서 내에서 형벌작용의 필연적인 기속원리가 될 수밖에 없다. 이 원칙은 수사절차에서 공판절차에 이르기까지 형사절차의 전 과정을 지배하는 지도원리이기 때문에 유죄판결이 확정되기 전에 피의자 또는 피고인을 죄 있는 자에 준해 취급하여 법률적·사실적 측면에서 유형·무형의 불이익을 주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피의사실공표로 인해 피의자는 유죄판결이 확정되기도 전에 이미 여론에 의해 유죄의 심증을 받게 되는 불이익을 겪는다. 이후 피의자에게 무죄판결이 확정된다고 하더라도 여론을 통해 이미 유죄로 낙인찍혔기 때문에 피의사실공표로 인한 피해의 회복은 쉽지 않다. 이에 형법은 제126조에 수사기관의 '직무범죄'로 피의사실공표죄를 규정하고 있다. 즉, 검찰, 경찰 기타 범죄수사에 관한 직무를 행하는 자 또는 이를 감독하거나 보조하는 자가 그 직무를 행함에 당해 지득한 피의사실을 공판청구전에 공표한 경우를 처벌대상의 범죄로 규정하고 있다. 피의사실공표죄는 1953년 형법이 제정될 때부터 범죄로 규정되었다. 당시에도 피의사실공표죄의 입법취지로 "피의사건에 대한 유·무죄의 성립은 법원의 확정판결에 의하여 결정되며 확정판결 전에 피의자는 무죄의 추정을 받는다.

피의자는 유죄의 확정판결을 받음으로써 범죄행위에 대한 법적 책임을 지게 되므로 법원의 확정판결 전에 피의사실이 공표됨으로 인한 불이익은 방지되어야 한다"고 적시되었다. 당시 법제사법위원장 대리 엄상섭 의원도 "한번 신문이나 소문이 퍼진 뒤에는 엎질러진 물을 다시 주워 담지 못하는 결과가 나서 피해자의 처지는 대단히 곤란할 것입니다."라고 입법취지를 설명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수사기관이 피의사실공표죄로 기소되어 처벌받은 적은 없다. 매년 국정감사 때마다 국회의원들이 피의사실공표죄에 대한 자료를 제시하지만 이 죄로 기소된 검사는 없었다. 형법에 범죄로 규정되어 있지만 사실상 적용되지 않는 사문화된 법인 것이다.

사문화된 원인으로는 첫째, 범죄행위의 주체와 공소제기의 주체가 동일하기 때문에 스스로에 대한 기소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과 둘째, 국민의 알 권리 보장이라는 명목하에 이루어지는 언론의 과열된 경쟁적 보도로 인해 피의사실공표를 범죄로 처벌하기 어렵다는 점 등이 제시된다. 수사기관 스스로에 대한 기소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도 문제이지만 과열된 취재경쟁도 문제라는 것이다. 피의사실공표죄는 언론의 보도가 이루어져야 실질적인 효력이 발휘된다. 피의사실공표의 과정과 절차의 적정성 및 익명으로 흘려진 사실의 진정성 여부를 떠나 대중의 이목을 끌 수 있다면 일단 보도부터 하는 언론의 과열된 취재경쟁이 피의자실공표죄를 현실적으로 적용되지 않는 사문화된 법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SNS까지 포함한 다양한 언론매체가 피의사실을 경쟁적으로 보도하고, 수사기관이 흘리는 피의사실정보를 원천적으로 막을 수 없는 상황에서 언론을 통한 피의자의 인권침해는 무한대로 확대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형법에 처벌대상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은 언론기관을 피의사실공표죄로 처벌할 수는 없다. 이에 무죄추정의 원칙 및 피의자의 인권을 고려해 기소 전 단계에서는 피의사실의 비공개를 원칙으로 하고 예외적으로 이를 허용할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하여, 확인되지 않은 피의사실을 '흘려주고' 언론이 이를 '확대 재생산'하는 것을 방지하는 방안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즉, 피의사실을 불가피하게 공개해야 하는 상황이라도 그 한계를 명확히 하여 피의자의 기본권 침해가 최소화될 수 있도록 엄격한 기준을 설정해야 한다. 이러한 기준을 위반해 피의사실을 공표하는 수사기관에 대한 엄중한 처벌에 대한 기준도 물론 함께 설정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