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만든 한지는 '세계유산'이 된다
▲ 경기도무형문화재 장성우 지장이 한지를 만들기 위해 발을 이용해 초지를 뜨는 작업을 하고 있다.

 

▲ 경기도무형문화재 장성우 지장이 만든 한지.

 

 

베고 짜고 삶고 뜨고 말리고 …
화학약품 없는 철저 전통방식
혹독 훈련 127년 제지술 계승
조선 교지용 재현 표창장 수상
규장각 왕조실록·로마 박물관
지류문화재 복원용 보급 성과

'베고, 짜고, 삶고, 말리고' 아흔아홉 번의 공정과 장인의 손끝에 달린 한 번의 물질 과정이 더해지면 비로소 1000년 역사가 깃든 '한지'가 탄생한다. 한 장, 한 장, 4대째 장인의 손으로 대물림된 대한민국의 전통 종이 한지. '우리 종이' 전도사 장성우(52) 장인을 23일 만났다.

#천년 기술, 백년 장인

1000년이라는 오랜 시간 속에서도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상태로 출토되는 고문서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이 고문서들에는 우리 고유의 제지술로 만들어진 한지가 사용됐다. 700년대에 만들어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로 보존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만 봐도 '우리 종이'의 우수성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제지 기술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한지는 아쉽게도 현재 국내에 몇 남아있지 않은 '한지장'들로부터 어렵사리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가평에 터를 잡고 4대째 한지를 만들고 있는 장성우 장인의 존재는 그래서 더욱 특별하다.

장 장인은 전국에서 손꼽히는 한지장이다. 그는 지난 6월, 경기도무형문화재 지장 16호로 지정되면서 국가무형문화재 제117호였던 선친 장용훈씨의 뒤를 잇게 됐다. 동시에 4대째 전수돼 온 127년 전통 제지술에 맥을 이어갈 수 있게 됐다.

"9년의 공백 끝에 아버지이자 스승이였던 지장 장용훈 선생이 일궈온 기술을 제가 이어 갈 수 있게 돼 무척 기쁩니다. 한편으론 제가 이 기술을 다음 세대로 계승해 나가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지요."

경기도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 위해선 필히 해당 분야에서 20년 이상의 경력이 검증돼야 한다. 이후 위원회로부터 까다로운 심사 절차를 걸친 뒤 무형문화재 타이틀을 얻을 수 있다. 무형문화재 심사 요건 중 가장 중요한 하나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둔 전통 방식 그대로를 재현해 내야 한다는 점이다.

"산업화에 따른 기기의 발달로 편리하고 쉬운 방식으로 종이를 만들어낼 수도 있지만 가치 있는 무형문화재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전통 방식에 따른 정직한 제지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만큼 무형문화재의 자리가 가볍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증조부때부터 가업을 잇다

올 29년째, 우리 종이만을 고집해 온 장 장인은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아버지까지 대대로 종이 만드는 일을 해온 가업 덕분에 제지 기술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봐왔다. 서당 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듯, 종이 만드는 일은 자연스럽게 장 장인의 손으로 넘어왔다.

"군대 전역 후, 아버지에게서 제지 기술을 배웠습니다. 처음엔 5년 정도만 하고 그만둘 생각이었지요. 그러나 이 일이 가업이자 저의 숙명이 됐습니다."

지난 1996년 경기도무형문화재 16호 지장 기능보유자였던 장 장인은 2010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승격되면서 국내 한지 장인으로 대표되고 있다. 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지장으로 홀로서기까지의 과정은 그리 쉽지 않았다. 그의 스승이자 아버지였던 장용훈 선생은 엄격했지만 누구보다 장인정신이 강했던 살아있는 문화재였다.

"아버지는 매우 엄격한 분이셨죠. 스승으로서는 더욱 냉철한 분이셨습니다. 새벽 3시면 어김없이 작업장에 나가셨던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병환이 역력하셨지만 일주일에 3~4번은 꼬박 종이를 만드셨습니다. 저는 30여 년 가까이 종이를 만들어 왔지만 아직까지도 아버지의 실력에 한 참 못 미칩니다. 종이를 뜰 때 나는 물 소리부터 달라요."

더할 나위 없던 좋은 스승인 아버지가 3년 전 작고하면서 장 장인은 힘든 시간을 보냈다. 늘 함께 하던 아버지가 곁에 없다는 슬픔을 이기고 오로지 혼자만의 기술로 자신있게 장인의 명맥을 잇기까지 아버지와 함께 했던 종이에 대한 기억과 추억, 경험은 홀로서기에 힘이 됐다.

#바티칸박물관 지류문화재로

장 장인은 엄격하고 혹독한 전수과정 속에 있었던 아버지의 단 한 마디 칭찬을 가슴 깊이 새겼다.
"딱 한 번, 아버지로부터 칭찬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2015년 당시 정부 '훈·포장 용지 개선사업'에서 조선시대 교지용 한지와 가장 근접한 전통 한지를 재현해 표창장을 받았었죠. 이때 아버지께서 애썼다는 말 한마디를 건네셨습니다. 그때 많은 보람을 느꼈고 위기의 순간이 닥쳐올 때 아버지의 칭찬이 가장 큰 자산이 될 거라 확신했습니다."

장 장인이 이끄는 장지방에서 한 장 한 장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진 한지는 현재 규장각 조선왕조실록 복본용에 쓰인다. 주로 국내 지류문화재에 복원 용도로 장지방 종이가 주재료로 사용되고 있다.

그가 만든 우리 종이의 우수성은 해외에서 먼저 알아봤다. 2015년 11월, 장 장인은 이탈리아 로마로 날아가 한지 전시회를 열고 한지 제조과정 시연에 나섰다. 이후 터키, 체코 등에서 문화재 보존용지 보급에 앞장서는 등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 도처에 한지의 우수성을 설파했다.

"내구성이 뛰어나고 오랜 시간에도 원형 그대로 보존이 가능한 우리 한지의 우수성을 그들은 높이 평가 합니다. 2015년부터 줄곧 로마 아띠 예술대학에서 제작 교육을 진행해 왔고 그 결과 바티칸박물관에 복원된 지류 문화재에는 우리 한지가 쓰이고 있습니다."

최근 한지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해외 판로 개척에 나선 그는 소망한다.
"전통 한지를 만드는 일이 열악한 현실 속에 있지만 1000년간 지속돼 온 우리 기술이 다음 세대 또 그 다음 세대로 이어질 수 있도록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글·사진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