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찬 인하대 물리학과 교수

한국의 반도체 산업을 겨냥한 일본의 수출규제는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던지며, 우리 산업구조의 취약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당장 반도체 생산 현장에서 필요한 장비나 소재 개발뿐만 아니라,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도 과학기술의 발전이 필수임을 온 국민에게 일깨워 주었다. 이는 과학기술을 담당할 고급인력 없이는 불가능하므로 지속적인 이공계 전문인력 양성을 위해서 정부의 종합적이고 치밀한 정책이 요구된다.
이공계 경제활동인구 1000명당 박사학위 소지자의 수를 보면, 우리나라는 8명 정도로 OECD 평균인 10명에도 못 미치는 실정이다. 18명인 미국이나 14명인 독일과도 큰 차이가 난다. 그동안의 고속성장에도 불구하고 고급인력이 아직 부족한 상태이다.

국가총생산량 대비 연구개발비는 세계 상위권이나, 이 중 대학연구비 비율은 9%이다. 영국의 25%, 독일의 18%에 비해 현저히 낮다. 대학에 근무하는 연구원 수도 다른 나라에 비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박사를 배출하는 중심 기관인 대학의 상황은 열악하다.

사회에서 필요한 고급인력을 양성하기 위해서 정부는 연구비 정책을 우선 개선해야 한다. 박사과정 학생의 연구 주제는 지도 교수가 수주하는 연구비의 주제에 좌우되고, 대학연구비의 상당 부분은 국가 재정에서 나오므로, 결국 국가 차원의 연구비가 인력 배출의 방향을 결정짓는다고 볼 수 있다. 그동안 정부가 지속적으로 지원하여 실효를 거두기 시작한 논문실적 위주의 연구비 예산을 그대로 유지한 채, 이제 우리 산업에 필요한 과학기술 분야의 대학연구비를 과감히 증액해야 한다.

최첨단 실험장비를 갖추고 턱없이 낮은 대학 연구 인건비를 현실적으로 증액하여 밤낮으로 일하는 박사과정 학생들의 처우를 현실적으로 개선하면, 우수한 인재를 과학기술 분야로 끌어들일 수 있다. 더불어 반값 등록금 정책 이후 악화일로에 놓인 대학의 열악한 재정 상황이 개선되어 대학의 대외 경쟁력이 높아질 수 있다.
산·학이 선순환 관계로 연계되는 연구생태계가 조성되도록 정부의 대학 평가제도가 개선되어야 한다. 우리나라 대학에서 시행되고 있는 논문실적 위주의 교수선발 및 업적 평가제도의 방향 전환도 필요하다. 오로지 논문 실적을 중심으로 교수 선발이 이루어지고, 교수들이 논문을 위한 연구에 매달리게 되는 시스템으로는 지금의 반도체와 같이 산업과 밀접한 분야에서 필요한 고급 인력을 길러내기 어렵다.

산업체에서 연구개발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도 교수가 될 수 있어야 하고, 산학협동 연구에서 성공적인 연구자도 인정받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한다. 대학이 학문을 위한 학문을 넘어서, 시대적 요구에 맞추어 다양한 연구 생태계를 주도하고, 사회와 자유롭게 소통하는 장이 되도록 정부는 각 분야의 다양한 특성을 고려한 종합적인 대학 평가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박사학위 소지자를 위한 일자리 정책도 병행되어야 한다. 중소기업은 고급인력이 부족하다고 하소연하고, 박사학위 소지자들은 연구환경이 갖추어지고 현실적인 임금을 받을 수 있는 직장이 많지 않다고 호소한다. 첨단 소재와 장비를 개발하는 중소기업으로 박사급 인력이 공급되도록 군 대체복무를 첨단 과학기술 관련 중소기업으로 확대하고, 이 고급인력에 대하여 재정을 파격적으로 지원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박사학위 소지자를 위한 일자리 창출이 제대로 이루어져서 이들이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대우를 받아야 우수한 인재들이 고생을 무릅쓰고 다시 이공계 대학원으로 오는 선순환이 이루어진다.

온 세계는 지금 고급인력을 유치하기 위해 전쟁 중이다. 오늘도 애써 키운 우리 고급인력이 중국, 유럽, 미국으로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산업화 시대와 같이 배고픔을 참고 애국심만으로 연구하던 시절은 지났다. 고급인력을 키우고 지키기 위한 정부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정부는 때를 놓치지 말고 과감히 투자해야 한다. 모든 정부 부서들이 유기적으로 협조하여 정책을 재정비하고, 연구 친화적이며 현실적인 정책을 장기간 일관되게 펼쳐야 한다. 일본을 넘어서는 선진국 진입은 과감한 투자 없이 구호나 열망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