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사장서 20년, 지독한 가난에도
도저히 詩는 포기가 안됐다

 

▲ 정세훈 지음, 푸른사상, 272쪽, 1만6000원

 

▲ 정세훈의 시 '우리가 이세상 꽃이 되어도'를 이외수 선생이 쓰고 그림을 그렸다.

 

"시라는 틀에 나와 같은 소시민들의 삶을 담아내고 싶었다. 공장에서 쓰다 버린 포장지 파지에 꾹꾹 눌러 담았다. 내가 담아내고 있는 것들이 제대로 한 편 한편의 시가 되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지만 열심히 담고 또 담았다. 한 2년간을 그렇게 담고 나니 웬만한 분량이 되었다.('공장 파지에 시를 쓴, 실패한 시인' 중에서)

시인 정세훈의 산문집 <파지에 시를 쓰다>가 출간됐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노동 현장에 뛰어들었지만,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시에 대한 열망을 놓지 않은 시인의 삶이 진솔하게 담겨 있다. 스스로 '실패'와 '패배'를 말하지만 그의 삶과 문학이 누구보다 치열했음을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우연히 읽은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을 접하고 처음으로 시인이 되겠다고 마음먹은 '홍성 소년'의 노동과 문학의 역정을 고스란히 담았다. 그는 가난한 가정형편 탓에 진학도 포기한 채 돈을 벌어야겠다고 작정하고 서울부터 부산까지 전전한다. 잘 곳이 없어 대형 냉동고나 가마솥에 숨어 지내야 했고, 취객에게 얻어맞다가 징역까지 살았다. 어렵사리 영세 에나멜 동선 제조업체에서 자리를 잡았으나 석면과 독한 화공약품 등에 노출된 열악한 작업환경으로 인해 건강을 잃는다. 하루 12시간 이상 노동한 대가로 얻은 것은 직업병뿐이다.

그러나 그는 문학에 대한 꿈을 놓지 않고 공장 작업장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파지에 시를 썼다. 세상은 그를 노동자 시인이라 부른다. 시를 통해 그는 노동의 가치와 인간의 존엄을 말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며 가난과 병마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 사이의 연대를 강조한다.

정세훈 시인은 자신을 '실패한 노동'이라고 규정한다. 그 스스로는 자신의 인생과 문학을 성찰하며 그렇게 규정할 수 있겠지만, 노동과 노동자의 가치가 인정받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워온 그의 삶을 누가 감히 실패라 할 수 있을까.

문학평론가 박형준은 "시인은 자본의 생존 논리나 프롤레타리아의 계급 언어로 환수되지 못하는 노동과 문학의 틈새까지 감지하고 기록함으로써, 노동 혐오를 조장하는 지배 질서의 통치 헤게모니에 파열음을 내며, 모든 인간을 생명의 대지 위에 안착시키고자 투쟁해왔다.외롭고 높고 쓸쓸한, 저 실존의 아카이브는 가난과 상처 그리고 병마로 얼룩진 패배의 기록이 아니라, 노동(자)의 '권리 언어'이자 다음 세대를 위한 '권리 장전'과 다르지 않다"고 평했다.

정세훈 시인은 1955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17세 때부터 20여 년간 소규모 공장을 전전하며 노동자 생활을 하던 중 1989년 <노동해방문학>, 1990년 <창작과 비평>에 작품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시집 <맑은 하늘을 보면> <저 별을 버리지 말아야지> <끝내 술잔을 비우지 못하였습니다> <나는 죽어 저 하늘에 뿌려지지 말아라> <부평 4공단 여공> <몸의 중심> 등과 장편동화집 <세상 밖으로 나온 꼬마송사리 큰눈이>, 포엠에세이집 <소나기를 머금은 풀꽃향기> 등을 펴냈다.

인천작가회의 회장, 리얼리스트100 상임위원, 한국작가회의 이사, 제주4·3제70주년범국민위원회 공동대표, 한국민예총 이사장 대행 등을 역임했다. 현재 인천민주화운동기념관 건립공동준비위원장, 위기청소년의 좋은친구 어게인 이사, 인천민예총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여승철 기자 yeopo99@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