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일 논설위원

"잘 있거라 인천아/이별 후에도 벚꽃은 무사히 피어나렴/머나먼 고향에서 쓸쓸한 밤에는 꿈에도 울리겠지 월미도야/기차는 떠나가고 항구는 희미한데 이제 이별의 눈물로 외치나니/뜨거운 인사를 받아줘요 그대여/고마웠어요 부디 안녕!"
일본 후쿠오카인천회가 1951년 출간한 '인천인양지(仁川引揚誌)'란 책에 수록된 노랫말이다. 8·15광복 후 인천을 떠나는 일본인들의 심정이 절절하게 담겼다. 1883년 개항 이후 인천에 살았던 일본인들이 1946년 3월2일 인천역에서 기차를 타고 마지막 철수를 할 때, 월미도를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며 불렀다고 전해진다. 비록 일제가 주도적으로 세운 인천이라곤 해도, 당시 일본인들이 몹시 아쉬워하는 만큼 인천의 풍광은 꽤 아름다웠지 싶다. 그 시절 사진들을 보더라도 신문물이 속속 들어오는 개항장 인천은 정말 '대단했다'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다. 물론 일제가 조선을 핍박하면서 이룩한 도시를 '괜찮다'고 하는 데엔 역사의식의 문제를 거론할 수 있겠다. 그래도 인천은 한국전쟁 발발 이전엔 전국 어디와도 견줄 수 없는 도시로서 자랑할 만한 요소를 두루 갖췄다.
이랬던 인천은 6·25전쟁이 터지면서 완전히 바뀌었다.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인천은 그야말로 초토화했다. 남은 건물이 거의 없을 정도로 잿더미로 변했다. 특히 인천 중심지였던 지금의 중구와 동구 등지는 쑥대밭을 방불케 했다. 항만 시설도 파괴돼 복구까지 한참 걸리면서 전국 제1의 항을 부산에 넘겨주는 쓰라림을 맛보아야 했다. 물론 전세를 확 바꾼 인천상륙작전은 세계 전사(戰史)에 길이 남을 기록이긴 해도, 인천이 겪은 참상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고 한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피해를 겪지 않은 데가 어디 있으랴. 하나 인천은 그 어디보다 커다란 '희생'을 감수한 곳이다. 오늘날 인천은 인구 300만명에 전국 3대 도시로 떠오르는 등 발전을 가속화하고 있지만, 꼭 상기(想起)해야 할 일이다.
인천시의회는 지난 6일 인천상륙작전 폭격 피해를 본 월미도 주민에게 시 예산으로 연간 300만원 이내 생활 안정 지원금을 지급하는 조례안을 가결·처리했다. 지금 살아 있는 피해 주민은 30여명으로, 전쟁 관련 피해 보상은 매우 이례적이다.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를 안고 고통에 시달리는 이들 월미도 주민에게 인도적 차원에서 최소한의 생활 지원을 하는 일은 필요하다. 마침 어제는 9·15인천상륙작전 69주년을 맞는 날이었다. 추석 연휴로 행사는 없었지만, 우리를 착잡하게 만드는 '기념일'임에는 틀림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