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냉전 해체되던 1986년 시작
매월 둘째 주 수요일 오전 7시 모여
이른 시각에도 연간 3000여명 참석
▲ 매월 둘째 주 수요일 오전 7시에 열리는 '새얼아침대화' 행사 모습. /사진제공=새얼문화재단

▲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사진제공=새얼문화재단

'새얼아침대화'가 처음 시작된 1986년은 인천은 직할시였다. 이 무렵 우리 사회는 권위주의 독재에 항거하는 민주화 시위가 연일 이어졌고, 분단 40년 만에 남북 고향방문단이 다녀가면서 분단체제에서 공존체제를 모색하는 움직임들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국제 사회도 이념의 장벽이 서서히 무너져 내리던 시기였다.

이런 시대에 새얼문화재단이 '아침대화(morning forum)'라는 형태의 조찬 모임을 추진한 것은 지금의 관점에서 봐도 선진적인 행보였다. 이후 '새얼아침대화'는 보수와 진보 진영 중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강사들을 폭 넓게 섭외했다. 학계에서는 이어령·최장집씨 등이, 문화·예술계 인사로는 고은·백낙청·황석영씨 등이 강연 무대에 섰다.

이론적 중립지대 형성에 성공한 새얼아침대화에서 인천지역 각계각층 세대와 인사가 어우러져 친교를 다졌다.

▲인천 풀뿌리 민주주의 역사
정치·이념에 얽매이지 않는 소시민들의 토론의 장이 되고자 했던 새얼아침대화는 1986년 첫 회를 시작한 이래 한 번도 빠짐없이 매월 둘째 주 수요일 오전 7시에 문을 열었다.

청장년 세대와 지역의 원로가 이른 아침 한 자리에 모였고 인천상공회의소의 회원과 인천의 노동조합 단체 지도자들, 인천의 행정가들과 인천의 시민운동가들이 테이블에 둘러 앉았다.

이런 면에서 새얼아침대화는 세대·지역·계층 간의 분열을 통합하는 구심점이 되었다.

33년의 세월 동안 새얼아침대화에 지켜진 원칙이 있다. 매년 1월에 초빙되는 인천광역시 시장을 제외한 모든 강사는 동일한 직위에 있을 때는 한 번 이상 초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정치적 중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현직 정치인은 초청 강사에서 제외된다. 다만 예외는 있었다. '새얼아침대화' 20주년을 기리며 제239회 행사에 4당 대표를 초청했다.

2006년엔 3월 한 달 간 연속 4주에 걸쳐 민주노동당, 민주당, 한나라당, 열린우리당의 당대표, 원내 대표를 연속으로 섭외해 그간 '새얼아침대화'가 지켜온 정치적 중립의 원칙을 지키면서도 대한민국을 이끄는 4개 정당이 생각하는 인천의 현주소를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2007년 대통령선거 무렵에는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 민주당 정동영 후보를 초빙해 정책과 비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명박 제17대 대통령은 2007년 대통령선거 후보 시절엔 피치 못할 건강상의 이유로 비록 아침대화에는 참석하지 못했으나 서울특별시 시장 재직 시절 아침대화 자리에 섰었다.

▲참가자 69%, 1년 7회 이상 참석
'새얼아침대화'는 매우 이른 시각에 개최되는 행사임에도 불구하고 매회 약 250~300명 가량의 인원이 참석한다. 연간 3000여명이 참여하는 셈이다.

2006년 새얼문화재단이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조사 참가자들 가운데 69%는 1년에 최소한 7회 이상(이 중 32%는 10회 이상) 아침대화에 참가한다고 응답했다. 이들이 아침대화에 참가하는 이유는 52%가 강사와 강연 주제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고, 31%는 새얼문화재단에 대한 애정 때문인 것으로 응답했다. 만족도를 묻는 설문에서 응답자의 96%에 이르는 이들이 만족스럽다고 답했다.

/장지혜 기자 jjh@incheonilbo.com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이 말하는 '새얼아침대화'
"함께 배우고 의견 나누고…인천의 사람을 키운 자리"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다보니 어느덧 33년의 세월을 넘어 아침대화 400회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인천 시민의 응집이요, 열정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아침대화를 기획하고 진행해온 한 사람으로서 고마운 마음이 하늘에 닿습니다. 이처럼 어려운 일을 꾸준히 지속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우리 뒤에 돈이나 권력이 아니라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소박하지만 진정한 목소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천 시민 여러분은 그 소리를 듣고 흘려보낸 것이 아니라 그 소리를 보고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세기(世紀)가 바뀌고, 세대(世代)가 이어지며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여 나라가 어려움에 처할 때, 시민은 정부만 쳐다보고 있을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어나 시대 상황을 타개할 방법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거대담론이 아니라 아주 작은 일로부터 시작하여 큰일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침대화를 처음 시작하던 1986년 인천시의 인구는 140만여 명, 인천시에 등록된 차량대수는 불과 4만9407대뿐이었습니다. 그러나 2019년 현재 인천시 인구는 300만 명이 넘었고, 자동차 대수는 150만 대에 이릅니다.

우리는 시민의 뜻과 힘을 모아 조용한 가운데에서도 우선 주민과 합의 없이 추진한 굴업도 핵폐기장 건설 반대운동을 실천하여 성공했습니다. 두 번째로 오늘날 인천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은 인천대교 주경간 폭 확대운동에 나서 시민의 뜻을 성취했습니다. 정부 예산이 이미 확정된 상태에서 이를 변경하는 일은 무척 힘들었지만, 마침내 성공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일들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뒤에서 적극적으로 협력한 정치인과 기업인들도 드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400회 동안 걸어온 새얼아침대화가 있었다고 자부합니다. 소박하지만 끈기 있는 시민들이 모여 함께 배우고, 의견을 나누고, 친교를 다지며 지역사회의 현안을 의논하는 자리가 바로 새얼 아침대화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인천 사람이 해야 할 일은 사람을 키우는 일입니다. 사람은 누가 키워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성장하는 것이지만, 주위 환경과 격려는 하늘의 뜻도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열자(列子)> '탕문편(湯問篇)'에 나오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은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줍니다.

산의 둘레가 칠백리, 높이가 만길이나 되는 태형(太形)과 왕옥(王屋)이란 큰 산에 가로막혀 출입할 때마다 불편함을 느꼈던 우공(愚公)은 가족을 모아 의논하여 이 산의 흙과 돌을 옮겨 발해(渤海)에 버리기로 작정합니다. 그의 부인이 "당신의 나이 90이요, 몸이 허약한데 어찌 이 어려운 일을 시작하려느냐"고 걱정하여도 우공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그 자신과 아들, 그리고 손자 셋을 데리고 처음엔 고독하게 일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가 꾸준하게 이 일을 하자 한동네에 사는 청상과부의 유복자까지도 자진하여 그 일에 협조합니다. 흙을 파서 삼태기로 운반하여 발해 끝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데 꼬박 1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이때 하곡에 사는 지식 있는 노인이 우공에게 "노령에 쇠약한 힘으로 일찍이 산에 있는 풀 한 포기 다치지 못할 터인데 그 많은 돌과 흙을 어쩐단 말이요"하며 그 우둔함을 비웃었습니다.

그러자 우공은 여유 있게 웃으면서 "당신 마음의 고루함이여! 고루해서 뚫을 수가 없구려, 어찌 과부의 어린 아이만도 못하오. 내가 비록 죽더라도 아들이 남아있고, 아들은 손자를 낳으며 손자는 또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은 또 아들이 있어 그 아들이 손자를 낳아 자자손손(子子孫孫) 끊어져 다함이 없을 것이고 반대로 산(山)은 더 커지지 않는데 무엇을 걱정하여 산을 평탄하게 못하겠소?"라고 답변했다고 합니다. 결국 우공의 정성에 감동한 천제(天帝)가 태형과 왕옥 두 산을 우공의 뜻대로 옮겨 놓았습니다.

때로 세상은 너무 거대해서 어떤 시도나 노력도 무의미한 일처럼 보이고, 때로 어리석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일을 시도하는 사람, 노력하는 사람을 키워야 합니다. 질타하기 보다는 격려와 협력하는 시민이 되어야 합니다. 나 스스로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 인천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자신은 비록 그런 세상에 살 수 없더라도 우리 후배, 후손들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