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수 논설실장

인천 중구청은 개항장 거리에 설치했던 인력거 동상과 고양이(마네키네코) 조형물을 철거했다. 한일 갈등 속에 보기가 민망하다는 민원 결과다. 이 거리는 10여년 전 일본풍으로 조성됐다. 무늬만 그렇다. 14채의 건물 외벽을 목재를 덧대 왜색풍으로 치장한 일본 가옥들도 있어 정작 개항장 사료문화의 의미는 담기지 않은 모습이다. 인천 개항장의 역사적 고증과 보전이 왜곡돼 나타나지 않아야 하겠다.

중구는 올해 인천감리서 터를 중심으로 백범 김구 역사거리 조성에 대한 연구용역을 발주하고 6개월에 걸친 연구 성과를 마무리하는 단계다. 강제노역에 시달리던 감리서를 탈옥해 서울로 피신했던 백범의 발자취를 찾아 10여명의 사학자들이 거듭 연찬회를 여는 등 연구에 몰두했다. 백범을 통해 일제침탈의 역사를 인천 개항장에 새기는 의미 있는 작업으로 평가된다. 이와 함께 개항장 일대의 독립운동 콘텐츠도 3·1운동 100주년을 계기로 중구의 관심거리이다. 이제 개항장이 단순한 관광자원이라는 시각으로 치장돼서는 안 된다.
인력거를 끌던 한국 청년의 빈궁한 삶에서 '운수 좋은 날' 김 첨지의 심정을 떠오르게 한다. 1920년대 중반 택시 영업이 경성부에 도입되자 인력거꾼들의 생계는 크게 위협받았다. 당시 경성 택시업계와 인력거꾼들의 갈등은 오늘날 '타다'와 택시업계의 갈등으로 비춰진다. 인력거 시대에도 승차거부 시비와 바가지요금도 있었다고 한다. 인력거꾼들의 생활은 빈곤했지만 일본인 영업주들은 이른바 사납금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던 시대였다.

인력거는 일본이 서양의 마차에서 창안한 근대의 교통수단이었다. 일본인보다 적은 삯을 받은 차부의 대부분은 한국인이었다. 1899년 5월 전차가 개통돼 인력거는 전차, 버스 등과 함께 1900년대 경성의 교통수단으로 정착됐지만 사회적 부와 지위를 누리는 사람들의 전유물이기도 했다. 조선의 고관대작들은 일본에서 인력거를 주문 제작해 들여와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다. 1908년 한성부가 인력거영업단속규칙을 공포할 정도로 도시 교통수단의 핵심이었음을 짐작하게 된다. 인력거꾼의 자질과 운임을 비롯한 속도, 정원, 주차장, 안전 운행 등을 규정한 기록들이 남아 있다. 일종의 운전면허와 자동차등록·검사증이 의무조항이었던 셈이다.
1894년 한국에 들어와 조선사회와 일제강점기를 풍미했던 인력거는 일본을 대표하는 문화적 상징이다. 중구청 앞 인력거 동상의 철거를 보며 나라 잃은 설움을 안고 빈곤한 삶을 영위했던 애잔한 선조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