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칼럼] 공감은 가슴으로 온다
[주민칼럼] 공감은 가슴으로 온다
  • 인천일보
  • 승인 2019.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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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미 인천녹색연합 초록교사

남편은 암환자다. 세 달마다 병원에 간다. 정기검진의 결과를 통보받기 위해 대기실에 앉아 있는 시간은 도무지 안정감이 생기지 않는 일이다. 간호사의 호명을 받고 들어갔다 나온 환자의 유쾌하지 않은 표정만으로 기분이 뜨끔거린다. 환자대기실 밖의 통유리창 너머로 봄이 초록의 밥상을 가득 차려도, 혹은 벚나무 단풍이 아무리 붉어도 자신이 듣고자 하는 바람의 말을 의사로부터 듣기 전에는 그 풍경들이 들어오지 않는다. 오히려 화사하고 멋진 풍경 자체가 비극을 배가시킬 수도 있음을 알게 된다.

"오른쪽의 암세포가 왼쪽과 뇌로 전이되었어요. 본격적으로 항암을 시작하셔야겠습니다."

아무 감정도 실리지 않은 담당의사의 선고가 있던 날, 영춘화는 도로에 늘어져 노란 게으름을 뽐냈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랬다. 화창한 날의 잔인함에 가슴을 베였던 아픔이다.
대기실에 앉아 희망과 절망의 문을 수십 번 여닫고 나서야 "○○님 들어오세요" 소리가 들리고 아무리 봐도 읽히지 않는 병든 남편의 폐 CT를 들여다보는 순간 혹시나 하는 생각이 앞질러 간다. 심장박동이 날뛰기 시작한다.

"안 컸어요. 그대로입니다. 세 달 후에 뵙겠습니다." 일상적이고도 무미건조한 그 말에 간담이 일순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다 다시 펴진다. 아, 인간은 작은 존재인가.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3개월의 생명을 유예받은 남편이 비로소 병원 차도에 핀 봄꽃에 시선을 던진다. "개나리꽃! 살구꽃도 예쁘네."

어느 봄날 계양산 둘레길을 걷다 산길 복판에 핀 애기나리꽃을 만났다. 삼각으로 올라온 돌덩이 아래 자리잡았다. 발 디디면 등산화와 돌멩이와의 공간이 채 5㎝도 되지 않았다. 운명의 얄궂음에 순간 숙연해졌다. 2개의 꽃송이 중 하나는 이미 누군가의 발길에 잎이 짓이겨지고 꽃대가 살짝 꺾였다.
길 안쪽으로 한눈에 보아도 기름져 보이는 숲속에 애기나리 군락지가 보인다. 한 두 송이 별 같은 흰 꽃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너는 어찌 이곳에 자리잡은 거니?" 금방이라도 꺾일라 애잔한 마음이 밀려온다. 애기나리가 의지해 있는 돌 옆으로 몇 개의 돌을 덧쌓고 기원해 본다. 운명에 지지 말고 꼭 씨앗을 남겨 멀리 퍼뜨리길. 더 이상 밟히지 말아라.
공감의 단짝은 고통, 결핍, 부재와 같은 단어들이다. 그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다른 세계로 나아간다. 발아래 밟히는 작은 곤충과 잡초들의 세계로 그리고 나와 다름으로 고통 받는 힘없는 사람들의 세계로 나아간다.
영원만 계속된다면 공감이란 말 자체도 생겨나지 않았으리라. 영생, 영원한 부, 영원한 젊음 그것들은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한다. 절망과 고통, 부재 등의 단어에는 전복성이 있다. 현재를 뒤엎어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창조의 원천이 된다.

공감은 가슴의 일이다. 그것은 절대 이성의 영역이 아니다. 머리로 오지 않는다. 직접적 경험이나 상상력으로 온다. 내가 말기 암 환자가 돼 보는 상상. 일주일을 굶어보거나 소경이 되어 백화점 가기 등의 체험을 통해 불편함이 가슴으로 들어온다. 고통, 그의 혹은 그녀의 부재, 절망으로 우리의 가슴은 넓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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