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에서] 인천시립극단 '거대한 뿌리'
[객석에서] 인천시립극단 '거대한 뿌리'
  • 장지혜
  • 승인 2019.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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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곡진 삶 위로 자유를 새기다
▲ 인천시립극단의 연극 '거대한뿌리' 가운데 한 장면. /사진제공=인천문화예술회관

일제강점기·광복·전쟁 거쳐온
시인 '김수영'의 생애와 예술혼
'창작극' 통해 생생하게 그려내


1968년 6월15일. 자유와 시대의 아픔을 노래한 시인 김수영이 버스에 치인다.

적십자병원 응급실 중환자실에 누운 그는 47년 인생을 되돌아본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정체성을 알아가던 시기, 해방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시작된 미군정과 전쟁, 그리고 죽음과도 같은 거제도 포로수용소 경험,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채 시작된 굴절된 현대사.

인천시립극단이 네 번째 창작극 프로젝트로 '거대한 뿌리'를 무대에 올렸다. 인천문화예술회관에서 8일까지 공연되는 '거대한 뿌리'는 시인 김수영의 삶과 예술을 생생하게 압축해 표현한다.

그가 보낸 굴곡진 시대 만큼이나 김수영의 삶에 대한 애환과 번민은 깊었다. 거짓을 거부하고 구속과 억압을 배격했지만 의용군에 끌려가고 포로수용소에 갇혀 비참하게 살았던 실제 삶은 그의 이상과 괴리가 컸다. '거대한뿌리'가 극 초반부터 줄곧 따라간 감정선은 김수영의 끊임없는 자학과 자아비판이었다. 불의와 억압에 앞장서 항거하고 싶지만 그렇지 못했던 그는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며 책망했다. 동시대를 살았던 '목마와 숙녀'의 시인 박인환에 대한 경쟁심과 열등감도 한 몫 했다.

"왕궁이나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는 욕을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에게 하는 나는 얼마나 옹졸하냐"고 한탄했던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라는 시도 이런 감정의 흐름 속에서 탄생했다.

연극은 '풀'과 같은 김수영의 시가 나온 배경에 시구(詩句)를 무대 위에 올리며 관객들의 이해를 도왔다. 김수영이 "나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던 그의 아내 김현경은 극중에서 끊임없이 그를 응원하고 이해하며 자유에 대한 시를 쓰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1968년 6월16일, 결국 산소 호흡기를 제거해 사망하는 그의 마지막 길을 4·19혁명 때 거리를 뒤덮었던 고교생 무리들이 애도하며 공연은 막을 내린다.

관객들의 큰 박수를 받은 이번 연극을 통해 '지금 왜 김수영인가'라는 물음을 떠올릴 법 하다. 대한민국의 정신과 존엄을 새삼 되새기는 요즘, 김수영이 말을 거는 것만 같다. 나무 줄기와 잎사귀는 짓밟혀 고난을 겪더라도 땅 밑에 거대한 뿌리가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장지혜 기자 jjh@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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