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환 논설위원

1988년 가을의 국정감사는 요란했다. 16년만에 부활된 국감인데다 연일 '5공 비리'가 쏟아져서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열기가 식지않아 노동위원회 국감은 더욱 관심을 끌었다. 약관의 초선 의원들이 '스타'급으로 부상했다. 당시 '노동위 3총사'로 불리던 노무현·이해찬·이인제 의원이다. 그러나 노동부 출입기자들은 이상수 의원(전 노동부장관)까지 보태 '노동위 4총사'라 불렀다. ▶5공 청문회 스타로 각인된 노무현 의원은 이미 그해 국감서부터 빛을 발했다. YS가 이끄는 통일민주당 소속의 노 의원은 국감장에서도 '격정' 그 자체였다. 일선 근로감독관의 노조활동 방해 사례를 파고 들었다. 그러나 노회한 노동부 관리들은 여당 의원들의 엄호 아래 요리조리 빠져나갔다. 어느 순간 그는 책상을 탕탕 치며 한탄해 마지 않다가 끝내 눈물을 글썽였다. 이인제 의원은 이와 반대의 스타일이었다. 변호사가 검사의 허점을 파고들 듯이 목소리 한번 높이지 않고 항복을 받아내곤 했다. ▶이해찬 의원은 노무현·이인제 의원을 합친 듯한 스타일이었다. 면도날처럼 예리하게 나가다가도 한번씩 '버럭'으로 상대를 제압했다. 초선이지만 재야 운동권 전력의 정치감각도 묻어났다. 이해찬 의원의 그런 활약 뒤에는 막강 보좌진이 있었다. 바로 유시민 작가다. 국감장 복도 등을 지키고 있던 그는 스마트하면서도 기민했다. 그가 뿌리는 보도자료는 이른바 '토씨 몇 개만 고치면' 바로 기사가 될 만할 수준이었다. ▶그 둘의 말은 여전히 날카롭지만 예전만한 '울림'을 잃은 것 같다. 지난달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가 한마디했다. 라디오에서 전해 듣는 순간 귀를 의심할 지경이었다. "지소미아 파기를 놓고 우리를 향해 비난하는 신(新)친일파 같은 행위는 그만둬야 한다." 지소미아 파기를 걱정하면 바로 신친일파라니, 순식간에 얼마나 많은 친일파가 새로 태어났을까. 지난주엔 유시민 작가가 "물 반 고기 반"이라는 언어 재치를 발휘했다. 서울대 촛불집회를 두고서다. "자유한국당 패거리들의 손길이 어른어른하는 그런 것"이라고 했다. 유 작가는 1985년 서울대 프락치 사건 항소이유서로 이미 문명(文名)을 날렸다. 마지막 문장이 이렇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지난주 어느 집회에서는 '신친일파의 공격에서 조국을 지키자'라는 주장도 나왔다. 평화의 소녀상도 '조국 수호' 플래카드를 들게 했다. 이러면 서울대도 친일파 소굴이 된다. 예전에 '말 많으면 빨갱이'라는 얘기가 있었다. 이제는 '나서면 친일파'인가. 마구잡이로 친일파를 양산해 나가는 것이 걱정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