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호 정치2부장

'한강의 기적'은 우리 누이들의 희생이 만들어냈다.
지난 8월9일 서울 국립민속박물관에서는 1970년대 부평 반도상사의 여성노동자 장현자(68·2대 노조지부장)씨가 출연하는 '옳은 일은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라는 제목의 갤러리 토크가 열렸다. 이 토크쇼는 국립민속박물관이 1960년∼1980년대 인천 노동자 20여명의 생활문화를 심층 인터뷰해 전시한 <메이드 인 인천> 행사의 한 부분이다. 국립민속박물관은 올해를 '인천 민속문화의 해'로 선정하고 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1년여의 준비과정을 거쳐 '가난해도 마음이 부자라는 거죠'(동일방직 이총각),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기 위해'(코리아스파이서 박남수), '공장에서 만난 친구 그리움'(키친아트 이종화), '정과 정의가 있던 시절'(두산인프라코어 손원영) 등 5편의 토크쇼를 구성했다.
이날 토크쇼는 국립민속박물관 안정윤 학예사와 장현자 지부장이 서로 대화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사이 사이에 황승미 작곡가가 '사노라면', '흔들리지 않게', '상록수' 등 노래와 기타 연주로 분위기를 더해주었다.

장현자 지부장은 1974년에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1974년 1월엔 긴급조치 1·2호, 1975년 5월엔 긴급조치 9호가 발령돼 거의 모든 집회·시위가 금지된 시절이다.
장 지부장은 1969년 인천 부평공단 반도상사(주)에 생산직으로 입사했다. 그는 "처음 입사했을 때 제품개발부에서 연구원 10명과 생산직 10명 등 전체 20명의 직원으로 시작했는데 모두들 가족처럼 지냈다"며 "연구 시제품을 만들 때, 누구라도 할 것 없이 밤을 새 연구원들과 함께 일하고 기뻐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부평공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1500명, 이어 3000여명의 노동자가 일하는 대형공장으로 성장했다. 반도상사의 가발 등은 미국, 유럽 등으로 불티나게 수출됐다. 1947년 락희(Lucky)화학공업사로 출범, 락희산업(주)을 거쳐 반도상사(주)로 상호를 바꾸었던 이 회사는 1984년 럭키금성상사(주)를 거쳐 오늘날 LG그룹이 됐다.
그러나 이 같은 회사 성장은 노동자들의 희생을 요구했다. 당시 20세 전후의 어린 여성노동자들은 한 달에 열흘씩 24시간 밤샘 작업을 강요당했다. 심지어 화장실 가는 것도 작업반장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고 폭언·폭행도 이어졌다. 장 지부장은 "퇴근시에는 '검신'이라하여 한 시간씩 줄을 서서 몸수색을 당했는데, 한 여성노동자는 검신 중 폭행으로 뇌진탕 상해를 입는 일까지 생겼다"고 말하며 눈시울을 적셨다. 구내식당도 분리돼 있었고, 관리자측 배식이 훨씬 좋았다. 메뉴가 국수인 날은 긴 줄을 섰다가 불어터진 국수를 먹어야만 했다. 이 같은 대우를 견디다 못한 여성노동자들은 마침내 긴 투쟁을 시작했다.

1974년 설날 전날(1월22일)까지 실시된 '퇴근길 검신'에 항의한 여성노동자를 회사경비원이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2월26일 3000여명의 노동자들은 임금 60% 인상, 강제잔업 철폐 등 7가지 사항을 요구하며 파업·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오전 9시부터 밤 11시까지 14시간 파업농성 끝에 회사 측으로부터 임금인상과 노조결성에 대한 약속을 받아냈다.

장 지부장은 "파업 당일 오전 9시 3명의 동료들과 함께 서울의 한 신문사를 방문했다. '긴급조치라 긍정적 파업보도가 어렵다'는 말을 듣고 나와 기자의 소개로 노동청을 방문했다. 천신만고 끝에 노동청 과장과 함께 오후 3시쯤 부평공장에 도착했더니 동료들이 반겼다. 이윽고 협상에 들어가 밤 11시쯤 노동조합 결성 등 요구조건을 쟁취하고 첫 파업을 승리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열흘 후인 3월5일 또다시 농성에 들어갔다. 중앙정보부와 회사가 어용노조 설립을 기도했기 때문이었다. 이튿날 아침 경찰이 출동, 여성노동자들을 강제 해산시키고 한순임, 장현자씨 등 4명은 중앙정보부로 연행, 도시산업선교회 등과의 관련 여부를 조사받고 각서까지 쓰고 나왔다. 그러나 마침내 4월25일 한순임씨를 지부장으로 반도상사 민주노조가 출범했다.
반도상사 노동조합은 독서모임, 교육강좌, 문화동아리 활동 등이 활발해서 조합원들에게 '반도 대학' 이라고 불리곤 했다.

장 지부장은 그 후 수 년 동안 노조활동을 하면서 수차례 연행됐다. 1981년 말에는 남산 보안부대의 서빙고에 갇혔다가 석방되었고 다음해 2월 결혼했다. 결혼 이후에도 성남시에서 탁아소 보육운동 등 시민운동을 이어갔다. 그러다 2012년 지방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대전시 서구 의원에 당선돼 활동했다. 60대 후반의 나이로 들어선 요즘, 장현자 지부장은 결혼한 두 딸이 사는 세종시에서 후배들의 여성운동을 지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