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 넘기면서 모두 행복하길"
▲ 최근 남북문제와 평화 등 분단의 아픔을 다룬 그림책 '봄이의 여행'(2019)을 출간한 이억배 작가가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성철기자 slee0210@incheonilbo.com

 

▲ 최근 남북문제와 평화 등 분단의 아픔을 다룬 그림책 '봄이의 여행'(2019)을 출간한 이억배 작가가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성철기자 slee0210@incheonilbo.com


서슬 퍼런 70년대 홍익대 조소과 진학
민화반 활동하면서 '전통미술'에 매료
예술의 '민주화' 꿈꾸다 아이들과 소통
'한중일 평화그림책 프로젝트'에 동참
'국제안데르센상 후보' 한국 대표 올라


그림책은 하나의 종합예술작품이다. 세대와 세대를 통합할 수 있는 장르의 작품이 탄생하기도 한다. 이억배(60) 작가의 그림책이 남녀노소에게 사랑받는 이유다. 그림책을 통해 남북문제나 평화 같은 무거운 주제를 담아내는 것도 이억배 작가이기에 가능했다. 그가 최근 '봄이의 여행'(2019)을 출간했다. 10년 전 분단의 아픔을 다룬 '비무장지대에 봄이 오면'(2010)의 후속작이다. 그림책을 통해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이 작가를 13일 안성에 있는 그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평화를 꿈꾸는 그림책
이 작가의 그림책은 그 자체만으로 '평화'를 이야기한다. 사회적, 역사적 의미의 평화부터 아이들에게 '이 세상은 살만하다'는 안도감을 주는 평화까지 모두 그가 담는 그림책의 주제다.

이번에 출간한 '봄이의 여행'은 남북문제와 관련한 이야기를 다루며 사회적, 역사적 의미로서의 평화를 탐구했다. '봄이의 여행' 속에는 '생명평화공원'으로 새 단장한 비무장지대(DMZ)가 등장한다.

"이 책을 그릴 때만 해도 남북관계가 이렇게 빨리 진전될 지 몰랐어요. 전작 '비무장지대에 봄이 오면'의 마지막 장면에서 할아버지가 망원경을 통해 북녘 땅을 바라보다가 북쪽에서 헤어졌던 형제와 손자들을 만나는 그림이 나와요. 지난해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이 포옹하는 장면을 보고 그림책 속의 장면이 실현된 것 같아 전율을 느꼈습니다. '봄이의 여행'에 나온 그림도 또렷한 현실로 이뤄졌으면 해요."

그가 남북문제나 평화의 주제에 접근하게 된 계기는 2006년 '한중일 공동기획 평화그림책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다. 일본의 그림책 작가들이 한국과 중국의 작가들에게 평화그림책을 제안했다. 오랜 진통 끝에 '봄이의 여행'이란 그림책이 탄생하게 됐다.

책 속에서 봄이와 할아버지는 금강산에 가고, 개성과 평양에서 전시회를 열고, 개마고원에서 캠핑도 한다. 이 작가는 하루 빨리 평화의 결실로 북한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대하고 있다.

그림책을 통해 모든 세대가 공감하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이 작가는 그림책을 일종의 '면역 주사'와 같다고 표현한다. 행복한 주제만 다룰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다.

"사회적으로 심각한 주제들을 아이들에게 어떻게 전달하느냐 하는 방법이 중요한 것이지 그런 주제 자체를 회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요. 아이들이 편안하게 볼 수 있는 그림책을 통해 아이들이 어른들과 함께 느끼고 고민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림책을 통해 의미있는 활동을 해온 이 작가는 '2020년 국제안데르센상 후보작가'에 한국 대표 작가로 이름을 올렸다. 국제안데르센상은 작가의 전 생애 작품을 평가해 2년마다 수여하는 세계적인 상이다.

▲전통을 계승하는 그림책
어린 시절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이 작가. 자연스럽게 진로는 미대 진학이었다. 80년대 민주화 열기가 가득할 때 홍익대 조소과에서 수학한 그는 민중미술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군복무 후 복학해 민화반에서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민화와 불화, 전통 채색화 등을 많이 접했던 영향으로 현재까지 이 작가의 그림책에는 전통적인 요소가 가득하다.

"어린 시절부터 서양미술의 우월함을 교육받고 자랐어요. 하지만 전통미술을 접하면서 완전히 매료됐다고 할까요. 민화, 풍속화 등 전통그림을 통해 작품을 표현하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게 생겨났죠."

그의 작품 중 80년대 추석 풍경을 담은 '솔이의 추석이야기'(1995)는 추석귀성행렬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고구려 벽화와 조선 행렬도에서 회화적 모티브를 얻었다. 또 전통 채색기법으로 그려진 '세상에서 제일 힘센 수탉'(1997)은 맑고 깊이 있는 색과 수탉의 모습 등에서 민화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는 다음 세대가 계승해야 할 전통 미의식을 고민한 작가의 흔적이다.

이 작가가 초기 작품 활동을 하던 시절에는 전통 채색기법을 살리기 위해 한지 위에 그림을 그리다보니 출판사들로부터 인쇄가 까다롭다는 이유로 출간을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전통은 자동으로 대물림되지 않아요. 어린 시절 할머니 선생님이 들려주신 옛 이야기처럼 누군가에 의해 전해져야 하지요. 후천적 노력이 필요합니다. 세대를 아우르는 몇 안되는 장르가 그림책이라고 생각해요. 그림책을 통해 우리 전통회화적 요소들을 접하면서 다음 세대에서도 전통을 계승하려는 노력이 이뤄졌으면 좋겠어요."

▲그림책으로 펼치는 다양한 활동
이 작가는 현재 활발하게 독자들과 만남을 갖고 있다. 그림책을 매개로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 즐길 수 있는 전시나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소통하고 있다.

"초기에는 어른들을 위한 강연을 주로 했어요. 그러다가 10년 전부터 강연의 판도가 바뀌더라고요. 지금은 초등학교나 도서관 등에서 그림책 관련 프로그램에 많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림책을 이야기하고 평화세상 그림 그리기 시간을 갖거나 비무장지대 철문 만들기 퍼포먼스 등을 통해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그가 그림책을 주제로 독자들과 교류하는 일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90년대 초까지 안양지역에서 민중문화운동에 참여한 그는 시민들과 소통을 위한 수단으로 다양한 현장미술활동을 해왔기 때문이다.
"당시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활동을 하면서 폭넓은 예술의 '민주화'를 꿈꿨어요. 소수의 엘리트가 아닌 대중이 '예술'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시민미술학교에서 노동자 판화강습을 했는데, 자기 표현이 중요했어요. 지금은 그 소통의 대상이 시민에서 어린이로 바뀌었다는 것뿐입니다. 그림책은 소통의 도구지요."
그는 국내외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개인 전시도 꾸준히 열고 있다. '이억배 그림책 원화전'(2004), '이억배의 상상력 작업실'(2012), '이억배 그림책전'(2016), '이억배 그림책원화전 이야기주머니이야기'(2016) 등을 통해 소통하는 그림책 작가로 자리 잡았다.

"그림책은 어른과 아이가 만날 수 있는 얼마 안되는 소중한 문화입니다. 그림책을 읽으며 서로의 체온을 느끼고, 책장을 넘기면서 아이와 어른 모두가 행복한 시간을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억배 작가는…
안양서 현장미술활동으로 잔뼈 굵어


1960년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난 이억배 작가는 수원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1979년 홍익대 조소과에 들어간 그는 졸업 후 90년대 초반까지 안양지역에서 민중문화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미술동인 두렁, 안양 우리그림, 우리들의 땅 회원으로 활동하며 노동자 교재에 삽화 만평을 그리고, 시민미술학교에서 시민과 노동자를 대상으로 노동자 판화강습, 출판미술 등의 현장미술활동을 펼쳤다.

1995년 출간한 '솔이의 추석이야기'를 시작으로 '개구쟁이ㄱㄴㄷ'(2005), '잘잘잘123'(2006)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으며, '손 큰 할머니의 만두 만들기'(2001), '모기와 황소'(2003), '넌 누구니?(2009)', '반쪽이'(2009) 등의 책에 그림을 그렸다. '세상에서 제일 힘센 수탉'(1997)의 그림으로 1997년 BIB(브라티슬라바 국제 일러스트레이션 비엔날레)에 선정됐으며, '손 큰 할머니의 만두 만들기'로 1998년 어린이문화대상 미술부문을 수상했다.

올해 한반도 분단의 아픈 역사를 다룬 '비무장지대에 봄이 오면'(2010)의 후속작인 '봄이의 여행'(2019)을 출간했다.

이 작가는 2020년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 한국 후보로 선정됐다. 2년에 한 번 글 부문과 일러스트레이션 부문에서 각 1명씩 수상자를 발표하는 이 상은 아동·청소년 도서 부문에서 노벨문학상에 버금하는 권위를 갖는다.


/안상아 기자 asa88@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