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대 철종 녹이기 직전 '해방'
'근로' 치하 상장·전시채권도
▲ 인천육군조병창 상장.  /사진제공=인천시립박물관

 

▲ 애국반 기관지.  /사진제공=인천시립박물관


일본이 한반도에서 빼앗은 금속류는 전쟁 무기로 재탄생했다. 광복이 될 때까지 매월 소총 4000정, 총검 2만정, 탄환 70만발, 포탄 3만발, 군도 2000정, 차량 200량 등이 만들어졌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국민등록 강제와 채권 발행 등으로 장기적인 약탈을 준비하기도 했다.

▲명대철제도종(明代鐵製道鐘)
400㎏에 달하는 이 철종은 중국 명나라 숭정11년(1638) 하남성(河南省) 상구현(商丘縣)에서 도교사원에 걸기 위해 만들었다. 일본은 한반도를 넘어서 중국까지 가서 금속을 공출했다. 일본군이 부평 인천육군조병창에 이 종을 두고 무기로 만들려는 찰나 해방이 됐다. 이경성 인천시립박물관 초대 관장이 1946년 옛 인천육군조병창 터(산곡동)에 남아있던 명대철제도종을 미군의 협조를 받아 인수했다. 이 종은 현재 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전시돼 있으며 최근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77호로 지정됐다.

▲사기그릇
일본이 식기류 공출 대체품으로 각 가정에 지급한 사기그릇에서 전쟁 총동원의 의지를 다지게 하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결전 식기(決戰 食器)', '공출보국(供出報國)'이라는 글씨와 비행기·포탄과 같은 무기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인천육군조병창 상장
1941년 일본은 전쟁에 쓸 무기를 제작하기 위해 육군 연습장으로 사용하던 부평평야에 인천육군조병창을 지었다. 여기에 한국인 노동력이 대거 차출됐는데 일본은 살인적 노동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상을 주는 이중성을 보였다. 소화19년(1944) 12월8일 발급된 상장은 인천육군조병창 제1제조소장 육군 중좌 쿠니츠 미키(國津三喜)가 제2공장 기계공 최종만(창씨개명 성명 山本鍾滿)에게 수여한 것이다. "열렬한 근로정신과 결근 없는 솔선수범"을 치하하는 내용이 적혀있다.

▲애국반과 국민등록
1938년 4월 일본은 전시(戰時)에 인적·물적 자원을 통제하고 총동원하기 위해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했다. 이어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이 조직되면서 가구 수 10호 단위로 애국반을 만들었다. 애국반은 조선인의 생활을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최말단 조직이었다. 애국반 기관지는 일제 정책을 선전하기 위해 일문과 국문으로 매월 두 차례 발행됐다. 인천시립박물관이 소장한 기관지는 소화18년(1943) 7월1일에 발행된 것으로 호적이나 출생·사망·혼인 신고를 강제하는 내용이다.

▲전시채권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제는 인플레이션의 억제와 전비 조달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위해 저축을 적극 장려했고 그 일환으로 채권을 다량 발행했다. 전시저축채권(戰時貯蓄債券)과 전시보국채권(戰時報國債券)이 대표적이다. 원금에 할증을 붙여 복권 형태로 지불하겠다고 했지만 실제 구매자가 원금 상환을 받을 수 없는 구조였다. 사행심을 부추겨 전쟁자금을 확보하려 한 일본 수탈의 증거다.

/장지혜 기자 jjh@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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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決戰' 조선인 밥그릇까지 침투한 제국주의 한반도를 강점하고 있던 일본은 대륙 침략을 위해 1931년 9월18일 만주전쟁을 일으켜 중국의 동북지방을 점령하고 '만주국'을 건설했다.여기에 만족하지 못한 일본은 1937년 7월부터 중국 전 국토를 대상으로 중일전쟁을 일으킨다. 이후 중일전쟁의 전선을 동남아시아와 태평양까지 확대했다.1945년 8월15일 일본이 전쟁에서의 패배를 인정하고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기까지 전쟁에 필요한 군수물자와 인력을 조달하기 위해 그들의 식민지 한반도를 수탈의 대상으로 삼았다. 소총과 군도 등 전쟁 무기의 재료가 될 만한 것은 모조리 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