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로 엮어낸 '조상의 지혜' … 반평생 반했다
▲ 전통한지를 잘라 만든 띠를 비벼 꼬아 만든 홑줄과 겹줄을 이용해 다양한 공예품을 만들어내는 지승공예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문화다. 생애 절반을 지승공예와 함께해온 홍연화 장인이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성철기자 slee0210@incheonilbo.com

 

 

헌책으로 생활용품 만들던 父에게
기법 배워 취미로 즐기다 공방 운영
'성남시 공예명장 1호' 지정된 뒤
민속전시관서 작업·연구공간 꾸려
현대적 디자인뿐 아니라 유물 재현
국제전·국내영화서도 작품 알려




'지승'이란 종이라는 뜻의 지(紙)와 꼰다는 뜻의 승(繩)이 합해진 말이다. 전통한지를 길게 잘라 띠를 만들고, 그 띠를 비벼 꼬아 만든 홑줄과 겹줄을 이용해 다양한 공예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지승공예다.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문화다. 생애 절반을 지승공예와 함께 해 온 홍연화(60) 장인을 성남에 있는 그의 작업실에서 8일 만났다.

#취미로 시작한 지승공예

한지를 길게 잘라 만든 띠를 비벼 꼬아 실로 만든 홑줄과 그 홑줄을 두 줄로 꼰 겹줄, 이를 가지고 다양한 공예품을 만들어내는 지승공예는 인내와 끈기의 예술이다. 일명 노엮개, 지노라고 불리며 버려지는 고서(古書) 등을 이용해 그릇이나 바구니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만들던 것에서 비롯됐다.

홍연화 장인은 33년 전 지승공예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26세 때 다니던 직장을 1년9개월 만에 그만두고, 취미로 배우던 지승공예에 매료돼 한지공방을 차렸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직장을 다니면서 무료한 일상을 달래기 위해 취미로 한지를 배웠어요. 그때 자연스럽게 알게 된 지승공예가 적성에 꼭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친 김에 지승공예에 전념하기로 용감하게 결정을 내렸지요."

홍 장인은 1986년 서울 송파구에 한지공방 문을 처음 열었다. 당시에는 지승공예가 널리 알려지지 않았고, 배울 수 있는 곳도 많지 않아 한지공예를 중심으로 취미반 수강생을 받았다. 공방은 곧 수강생들로 붐볐고, 홍 장인은 매주 40~50명이 넘는 수강생들을 대상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공방 오픈 초기 취미로 한지를 배우려는 주부 수강생들이 많았어요. 당시에는 지승공예보다 대중적이던 한지공예가 인기였죠. 공방을 운영하면서 지승공예는 개인 취미로 해왔습니다. 그러다 2007년 본격적인 프로그램을 처음 개설했어요."

한지공방을 운영하며 서울에서 7년을 보낸 그는 성남으로 내려와 지금껏 지승공예가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무아지경(無我之境)의 매력

홍 장인이 지승공예에 눈을 뜨게 된 배경에는 그의 아버지가 있다. 농한기 때면 고서를 찢어 갖가지 기법으로 엮어가며 다양한 용품을 만들어 내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자랐다. 어린 시절 고향 서당에서 한학을 배운 아버지에게는 서책이 많았다.

홍 장인은 지승공예 작품을 만들면서 아버지가 만들었던 물건들을 떠올렸고, 그때부터 아버지에게 하나 둘씩 기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함지박이나 연필꽂이, 붓 통, 반짇고리, 씨앗 바구니 등 버려지는 책을 재활용해 물건을 만들던 것이 지승공예의 시초에요. 아버지는 헌책이나 짚을 이용해 항상 무언가를 만들어 내곤 했는데 모두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들이었죠. 솜씨도 좋아 마을에 소문이 자자했어요."

지승공예는 작품을 만들기 전 재료가 되는 홑줄과 겹줄을 만드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한지를 비벼 꼬아 홑줄을 만들고 이를 다시 두 줄로 꼬아 겹줄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거쳐야만 작품 제작을 위한 준비가 끝난다. 이 때문에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홍 장인이 1년간 내놓은 작품도 한 두 개뿐이다.
"지승공예는 자연에서 나오는 재료를 그대로 가지고 엮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요. 한지를 꼬고 엮어 재료를 만들어 내는 고통이 엄청나죠. 하지만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빠지는 매력이 있어요. 무념무상(無念無想)이라고 해야 할까요. 한 번 시작하면 하루가 다갈 정도로 몰입하게 하는 힘이 크지요. 행복감을 느낍니다."

홍 장인이 오랜 시간 한 땀 한 땀 재료를 엮어나가며 작품이 완성되어 가는 것을 볼 때면 힘든 과정들을 잊어버릴 정도로 희열을 느낀다. 인내와 끈기의 과정인 지승공예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만큼 엮임과 쌓임을 통해 섬세한 표현을 할 수 있다.

"지승공예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어요. 예전에 궁에서 신은 신이나 갑옷을 종이로 만들기도 했죠. 활용도가 굉장히 높습니다. 선조들은 주루막(망태), 항아리, 관복함, 화살통, 요강 등 다양한 생활용품을 지승공예로 만들었을 정도로 쓰임새가 정말 다양해요."

#지역에 뿌리내리는 전통문화

홍 장인은 지난 2016년 성남시 공예명장 1호로 지정됐다. 전통공예를 계승·발전하는데 이바지한 전문인으로 인정받았다. 지정 3년 만인 올해 7월에는 성남시민속공예전시관 내 마련된 명장관으로 작업공간도 옮겼다.

"평생 개인 공방을 운영해오다 처음으로 갖게 된 작업공간이자 연구공간입니다. 문을 연 지 한 달 정도밖에 안 됐지만 작품 활동을 펼치는 제자들이 찾아와 함께 연구도 하고, 소통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지요."

홍 장인은 그동안 마땅한 공간이 없어 창고에 쌓아놨던 지승공예 작품들을 모두 이곳으로 옮겨 전시 중이다. 그가 지금까지 작업한 작품은 대략 200점이다. 현대적 디자인의 작품을 만들어 낼 뿐만 아니라 유물 재현에도 힘쓰고 있다. 그는 요즘 지의(紙衣)인 겨울용 방한조끼를 재현하기 위해 작업을 진행 중이다.

"유물 재현을 위해 전국 박물관을 다니며 실견(實見)하고, 책을 찾아가며 연구했어요. 시간이 많이 걸리고 재료도 미리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기법 등을 정확하게 알아야 하죠. 전통기법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작품들도 많은데, 작품들 모두 엮어서 꼬아 만드는 전통에 바탕을 둔 것이라는 점은 다르지 않아요."

홍 장인은 가장 보람 있는 순간으로 지난 4월 밀라노에서 열린 '2019 한국공예 법고창신' 전시에 참여한 일을 꼽았다. 문화체육관광부 등이 한국공예 작품을 선보이기 위해 기획한 전시로, 올해는 지승, 옻칠, 명주 등 국내 장인 23명의 공예작품 75점을 출품했다. 이 전시에서 홍 장인도 2개 작품을 출품했다.

지승공예 부문에서 독보적 존재로 손꼽히는 홍 장인은 지난해 경기천년 장인으로, 2013년 한국예총 명인으로, 2005년 한지공예 부문 경기 으뜸이로도 선정된 바 있다. 그의 작품은 영화에도 등장한다. 전통 한지를 소재로 다룬 임권택 감독 영화 '달빛 길어 올리기'(2011년 개봉)에서 영화 속 주요 장면마다 나오는 한지공예품들 모두 그가 작업한 것들이다. 홍 장인은 다양한 분야에서 지승공예를 알리며 우리 전통문화의 명맥을 굳건히 이어가고 있다.

"취미로 시작한 지승공예가 꿈이 되고 목표가 됐어요. 우리 조상의 슬기로운 지혜와 솜씨가 담긴 지승공예를 계승해 나가고 싶습니다. 전통은 어릴 적부터 내려오는 것을 답습해 이어가는 일이기 때문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사라지기 십상입니다. 거창한 것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나고 자란 곳에서 우리의 것을 소중히 여겼으면 합니다."

/안상아 기자 asa88@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