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용노동자 부모 따라 히로시마서 나고 자라 "시내 갔다면 죽었을 것"
▲ 13일 인천시의회에서 열린 '원폭피해자 증언 및 지원을 위한 간담회'에 참석한 이기성(83) 어르신이 히로시마 원폭 당시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상훈 기자 photohecho@incheonilbo.com


인천에는 일본 원자폭탄 피해자 41명이 살고 있다. 원자폭탄이 떨어진 지 74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이들은 여전히 원폭이 떨어진 그날의 기억과 불안감을 안고 산다. 부모님이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되면서 히로시마에서 나고 자란 이기성(84)씨는 여전히 그날의 풍경을 생생하게 떠올린다.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든 1945년 8월6일, 당시 9살이었던 이씨는 가족들과 일본 히로시마시 고이혼마치에 살았다. 그의 부모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가 징용노동자로 철도 건설 작업장에서 근무했다.

그날따라 아침식사가 늦었다. 몸살 기운이 있던 어머니가 늦게 일어난 탓이다. 시내로 일하러 나가야 하는 부모는 물론, 학교에 가야 했던 이씨도 여동생들과 밥을 먹고 있었다. 오전 8시를 넘길 때쯤 갑자기 굉음이 들렸다. 깜짝 놀란 그는 혼자 마당으로 뛰어나갔다고 한다. 산등성이에 있던 집에 돌풍이 몰아치자 이씨의 이마는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불에 덴 듯 이마가 뜨거워 병원에 갔더니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의사가 '겨우 이런 것 때문에 바보 같은 조선인이 왔다'며 화를 냈다"며 "주변에는 살이 녹아내리는 듯한 사람들이 한가득 실려와 있었다"고 회상한다.

'빨간 소독약'을 겨우 바르고 나온 병원 앞은 장사진이었다. 자동차와 자전거와 수레로 사람들은 끊임없이 실려왔다. 뜨거운 여름볕과 함께 살이 타는 듯한 지독한 냄새가 거리에 가득했다. 전쟁을 끝내려고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에 첫 번째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날, 그날은 그에게 '지독한 냄새'로 남았다.

이씨는 "아무도 원자폭탄이란 걸 몰랐다. 어머니는 한센병이 아닐까 걱정하며 된장에 담뱃재를 섞어 발라주곤 했다. 하지만 물집이 생기고 화상 자국이 사라진 후에도 눈썹이 자라지 않았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다행히 '그의 눈썹' 외에 가족들은 원폭으로 인한 피해를 크게 입진 않았다. 폭탄이 떨어진 직후 집이 무너져 아버지가 다리를 다친 것을 빼면 말이다. 그는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산등성이에 집을 꾸리고 살았기 때문이라 추측한다. 그러면서 "부모님이 일하러 조금만 시내에 일찍 갔다면, 여동생과 학교를 조금만 일찍 갔더라면 다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가난한 그들 가족은 해방이 된 이후에도 한국으로 선뜻 건너오지 못했다. 이미 고향 땅을 떠난 지 십여년이 된 만큼 아무 것도 없는 고국을 선택하긴 어려웠다. 뒷산 방공호에 두 달 가까이 숨어 살던 그들 가족은 1945년 9월 중순에야 겨우 배를 타고 부산에 건너왔다. 빈손으로 고국 땅에 돌아온 그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며 한참을 뿔뿔이 흩어져 지내야만 했다. 그는 부모님의 고향인 경남 합천에서 시작해 서울·강원 등지를 떠돌아다니며 농사를 지었다. 자신이 '원폭 피해자'란 사실은 10여년 전 인천에 정착한 뒤에야 알았다.

이씨는 "생각해보면 참 원통하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한국 와서는 학교도 못 가고 한글도 못 배우고 일만 죽도록 했다. 자리잡고 원폭 피해자로 인정받을 즈음엔 둘째 누님은 배가 아프다고 돌아가시고, 이후 큰 형님은 가족들을 원폭 피해자로 빨리 등록 못 해 미안하다고 유언을 남겼다"고 말했다.

/김은희 기자 haru@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