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손들 수십년간 보훈처 문 두드렸지만 "불분명" 보류
인천대 중국학술원서 행적 밝혀내 … 정부에 포상 신청
▲ 13일 인천 연수구 송도동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에서 열린 '독립유공 대상자 550명 포상 신청 설명회'에 참석한 이태룡(가운데 왼쪽)초빙연구위원과 조동성 (왼쪽 두번째) 인천대학교 총장이 독립유공 포상 신청 대상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양진수 기자 photosmith@incheonilbo.com


96년 전, 스무살이던 조선 청년 임인호(林仁昊)는 '펜' 대신 '칼'을 들었다. 어린 나이에도 그는 맹렬한 기세로 일제 횡포에 맞서 반일 투쟁에 나섰다.

옥중 생활 후유증으로 병마와 싸우다 희생돼 우리 기억 속에 사라진 그가 3·1 운동 100주년만인 올해 독립유공자로 이름을 되찾는다. ▶관련기사 3면

임인호 선생의 딸인 임희숙(82)여사는 13일 "어머니가 40여년 동안 선친이 남긴 쪽지를 들고 발이 부르트도록 노력해서 국가보훈처에 포상을 신청했지만 계속 반려해 가슴에 한을 품은 채 돌아가셨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임 여사는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이 제74주년 광복절을 맞아 독립유공자 550명을 발굴, 정부에 포상을 신청하는 설명회에 참석해 그간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임인호 선생은 1904년 평안북도에서 태어났다. 조국 광복을 위해 그는 1923년 통의부 제 5중대에 입대해 일본 군경과 전투를 벌였고, 1925년 정의부에 전속돼 제5중대에서 활약했다.

임 여사는 "아버지는 중국 길림성에서 장철호 부대에 정보를 전달하고, 심부름도 하며 독립군으로 활동했다. 어머니 역시 앞치마에 총과 돈을 숨겨 전달하다가 잡혀 옥살이를 했다"고 했다.

그러다 1931년 만주사변 때 그는 조선혁명군으로 활동하다 1934년 일본에 붙잡혀 3년여 동안 옥고를 치러야만 했다. 1937년 간신히 출옥했지만 모진 고문과 오랜 옥고 탓에 광복 이듬해인 1946년3월5일 43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그렇게 잊혀져가던 그의 행적은 임인호 선생의 아내 고(故) 차동춘 여사가 간직하고 있던 남편이 남긴 사진 1장과 쪽지 몇 장으로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1981년 임 여사는 아버지의 독립군 행적을 조사하기 시작했고, 국립도서관과 여러 책 등을 통해 아버지 행적과 이름이 실린 것을 확인했다.

이 자료들을 근거로 임 선생의 가족은 국가보훈처에 포상을 신청했지만 보훈처는 '자료상 인물의 동일인 여부가 불분명하다'고 보류했다.

그렇게 40년이 지난 6월, 임 선생의 가족은 이태룡 중국학술원 초빙연구위원의 독립 유공자 발굴 보도 기사를 보고 그에게 편지와 관련 자료를 보냈고, 이 연구위원의 노력 끝에 임 선생 행적이 세상에 드러나게 됐다.

임희숙 여사는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 사랑을 많이 받은 제가 아버지의 명예를 찾아 드려야한다는 유언을 남겼다"며 "아버지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인정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정회진 기자 hijung@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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