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30일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난 아키히토 일본 천황은 여전히 일본 평화주의의 상징과 같은 존재이다. 그는 세 살 때 중일전쟁, 여덟 살 때 태평양전쟁을 경험하고, 미군의 공습이 시작되던 12세 때부터 방공호 생활을 했다. 패전 이듬해 13세의 소년 황태자는 새해 첫날 그해의 다짐에 붓글씨로 '평화국가건설'이란 문구를 썼다. 그는 1989년 1월 천황에 즉위하면서 "일본국 헌법을 지키고 그에 따라 책무를 다할 것"임을 천명했다. 그의 신념은 30년 동안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아베 총리와 유독 거리를 두며 일본의 우경화 바람을 늘 경계했다. 천황은 사적으로 신임 총리 부부를 황궁으로 불러 환영 만찬을 여는 전통이 있는데, 아베 총리만은 한 번도 초대받지 못했다. 아베의 정책 노선을 반대한 천황의 푸대접이다. 그의 장남 나루히토 역시 즉위 후 첫 소감으로 "세계평화를 간절히 희망한다"고 했다. 이렇듯 일본 천황가를 비롯한 많은 일본인과 아베 추종 정치세력과는 분명하게 구분해야 한다. "'극우 정권'인 아베 정권이 한반도의 경제 도약을 막아 일본의 영향 아래 두려는 시도이다. 국민 30%만 일본 정부 발표를 믿는다." '아베를 추종하는 일부 극우세력'이 동북아 주도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호사카 교수의 진단에 공감한다.

노 재팬(No Japan), 신(新)물산장려운동, 생활 속 일본 잔재 솎아내기 등 일본 아베 정권의 경제침략에 맞선 국민의 활약이 마치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수원시가 일본제품 불매, 일본여행 보이콧을 실천하는 신물산장려운동에 불을 댕겼다. 이천시도 일제 강점기 때 토지 수탈을 목적으로 작성된 지적·임야도의 등록원점(동경측지계) 체계를 세계 표준좌표(세계측지계)로 바꾸기로 했다. 군국주의 망령에 사로잡힌 아베 정권이 건드려서는 안 될 국민의 '역린(逆鱗)'을 건드린 것이다. 이쯤에서 돌이켜보자. 이번 일을 반면교사로 삼자는 것이고, 지난 일이라 치부하기엔 영 개운치 않기 때문이다. 이번 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중소기업이 화학·플랜트업체 C&B산업㈜이다. 이 회사는 8년 전 99.99999999%(텐나인) 불화수소 특허를 받았다. 일본이 수출 규제를 건 불화수소의 순도 99.999%(파이브나인)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순도가 훨씬 높다. 이 회사 사장은 "시설 투자비가 50억~100억원이 들고 판로가 확실치 않아서 접었다"고 했다. 누구의 잘못이던가. 정부와 대기업은 '기술 경쟁력 강화'와 '중소기업 상생'을 숱하게 외치면서도 쑥쑥 자라야 할 중소기업의 싹을 자른 건 아닌지.

지난 4일 고위 당정청 협의회에서 정부가 잘못을 고백했다. 그러면서 내놓은 대책이 ▲대외 의존도를 획기적으로 낮추고 경제 체질 근본 강화 ▲소재·부품 장비산업 경쟁력 강화 최우선 순위 등등. 지금도 뜬구름 잡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 지난 7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수원상공회의소에서 도내 기업인들을 만난 것을 왜 비공개로 했는지 짐작된다. C&B산업은 다시 생산 추진을 검토했지만 결국 접었다. 회사 관계자는 "가장 큰 문제는 공장부지 문제였다. 화학 관련 공장, 특히 불산을 다루는 공장은 정말 짓기가 어렵다. 화학물질관리법 등 규제뿐 아니라 주민들의 반대가 너무 심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고 했다. 39년 전 1980년 8월11일.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은 대한해협 횡단에 도전했고, 국민은 그의 성공을 바랐다. 그는 60㎞를 13시간16분10초만에 건너며 국민을 열광하게 만들었다. 그가 원영(遠泳)에 빠져든 것은 단 하나의 이유에서였다. 일본에 질 수 없다는 신념에서다. 1972년 일본인 다카시마 쇼지가 대한해협 횡단에 나섰다가 막바지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조오련은 1982년 차디찬 도버해협을 건넜고, 2008년 7월31일 독도 주변을 33바퀴 헤엄쳤다. 독도 넓이는 축구장 23개를 합친 정도로 한 바퀴 돌면 5㎞를 수영한 셈이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의지를 가슴에 품고 165㎞, 420리를 헤엄치며 국민의 답답함을 뻥 뚫어주는 '사이다 활약'으로 큰 자긍심을 심어줬다. 지금 조오련이 그립다.

/정재석 경기본사 사회2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