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철거한다면, 세 번 세울겁니다
▲ 수원 지역에서 평화·인권운동에 앞장서는 목회자이자, 수원평화나비 상임대표로 있는 이주현(60) 목사가 8일 인천일보와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그는 시민의 힘으로 해외에 '두번째 평화의 소녀상'을 건립한다는 포부다. /김철빈 기자 narodo@incheonilbo.com

 

▲ 위안부 피해자 고(故) 안점순 할머니가 독일에 건립된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에 참여, 소녀상의 손을 잡고 시민 앞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제공=수원평화나비


시민운동 213일 만에 뜻 이뤘지만
日영사 압박에 비문·해설문 없애

온전한 의미 전하려 내달 독일추진위 출범
포기 않는 용기, 안점순 할머니께 배웠죠


2017년 3월 8일, 한국에서 8000㎞ 이상 떨어진 독일 남부지역의 한 작은 공원. 가지런히 모은 두 손, 단발머리, 맨발의 모습으로 의자에 앉은 소녀는 유난히도 눈부셨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명예와 인권회복을 위한 조각상, '평화의 소녀상'이 해외에 들어선 순간이다. 한 남성이 시민과 손잡고 나선 지 장장 213일이 걸렸다.

'사람을 중요시하는 목회자'란 별칭을 가지고 있는 이 남성은 또 다른 길을 걷고 있다. 그가 향하는 시선은 오로지 평화와 인권, 정의였다.

이주현(63) 목사이자 '수원평화나비' 상임대표는 현재 독일 바이에른주(州) 레겐스부르크시 인근 지역의 공원(네팔 히말라야 파빌리온)에 있는 '유럽 최초의 소녀상'을 주도한 인물 중 한명이다.

2016년 수원에선 시민들이 모금 등 과정으로 독일 프라이부르크시에 소녀상을 건립하겠다는 초유의 운동바람이 불었다. 90여개에 달하는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할 정도로 파급력이 컸다.

출발은 10명 내외였다. 앞서 이 목사는 지역 여성단체 등에 해외 소녀상 건립을 제안했는데, 마침 일부 단체도 이 목사와 같은 뜻을 품고 있었다.

이들은 그해 8월부터 만나 구체적인 계획에 머리를 맞댔다. 하지만 우려가 컸다. 지역에서, 관 아닌 시민이, 국내 아닌 해외에, 소녀상 건립을 이루는 건 사실상 무모한 도전이기 때문.

다행히 시민의 지지가 잇따랐고, 수원시도 자매도시 관계인 독일 프라이부르크시에 협조를 구하는 등 도왔다. 이에 내달 '독일 평화의 소녀상 건립 추진위원회'가 출범한다.

그런데 예상 못한 암초를 만났다. 일본이었다. 일본 정부와 일본 우익세력은 조직적인 프라이부르크시에 조직적인 압박과 방해공작을 폈다.

이 목사는 "프라이부르크시의 시장이 수원시민, 염태영 수원시장의 뜻을 받아들여 소녀상 건립에 적극적이었는데, 일본의 방해가 아주 조직적이었다"며 "시민들은 기대가 컸던 만큼 충격도 컸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결국 소녀상 건립은 추진 한달 여 만에 무산됐고, 시민들은 좌절에 빠졌다. '추진위 해산'까지 거론될 때 즈음, 이 목사는 시민 몇 명을 붙잡고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들의 소원, 우리가 반드시 지켜 드려야죠. 일본에게 질 수 없습니다. 포기하지 맙시다."

이렇게 해외 소녀상을 염원한 시민들의 두 번째 도전이 시작됐다. 이번 움직임은 철저히 비밀리에 부쳤다. 속도도 종전보다 더 냈다. 혹시 모를 일본의 반발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 목사는 한인교회협의회 등 네트워크를 활용, 동료들과 함께 마치 임무를 수행하는 '특사'같은 활동을 했다. 이들은 독일 마을을 돌며 소녀상 건립의 필요성을 전파했고, 곧 들불처럼 건립운동이 확산됐다.

이 목사는 "소녀상 건립을 추진하는 시민들은 이미 한번 실패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어 더욱 조심스럽게, 극비리에 행동했다"며 "짧은 시간 안에 모두 사활을 걸고 움직였다. 나와 독일 현지 활동가와 주고받은 이메일만 약 900통에 달한다"고 설명했다.

기적적으로 뜻에 동참한 독일 시민모임도 탄생했다. 소녀상을 통해 평화와 인권을 알리고자했던 당시 그들의 의지는 서로 맺은 협약 내용서 고스란히 볼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은 11개국 여성 20만여 명을 강제로 연행하거나 속임수로 끌고 가 군인을 위한 성노예로 삼았다. 여성들의 고통을 기억하고 인권과 명예가 정의롭게 해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독일 평화의 소녀상을 세울 것이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을지라도...(생략)"

비로써 프라이부르크시 소녀상이 무산된 지 7개월 여 만에 독일 소녀상이 제막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다음날부터 일본 영사가 직접 현장에 찾아와 장소를 제공한 측에 항의와 협박을 쏟아냈다.

결국 이 목사와 시민들은 소녀상과 같이 건립된 비문과 해설문이 철거되는 좌절을 다시 겪어야 했다. 일본으로부터 소녀상이라도 지키기 위한 쓰라린 조치였다.

이 목사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제막 당일 비가 와서 비문과 해설문에 본드 작업을 못했는데 이로 인해 철거 과정 중 훼손되지 않았다"며 "비문과 해설문이 없으면 소녀상이 갖고 있는 의미를 전달 못한다. 온전한 소녀상을 만들고자 하는 우리 의지가 꺾이지 않는 이유"라고 강조했다.

"우리가 할머니를 도운 게 아니다. 할머니가 우리를 도운 것이다." 이 목사는 포기하지 않는 용기를 지난해 3월 별세한 위안부 피해자 고(故) 안점순 할머니로부터 얻었다.

이 목사는 "시민들이 유럽 최초 소녀상을 세우고, 수원평화나비라는 시민단체도 만들 수 있었던 건 안점순 할머니의 용기와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할머니는 위안부 피해 이후 모든 사람과 등을 돌릴 정도로 고통 속에 살았으나, 견뎌내고 우리에게 와주셨다"고 말했다.

이 목사는 이어 "할머니는 아픔을 딛고 직접 평화·인권운동에 나섰다. 2015년 화해치유재단이 제시한 1억원의 합의금도 거부하셨다. 우리에게 그분은 정신적 지주이자, 힘들 때 다독여주는 어머니였다"며 "할머니와 시민단체가 1주에 한차례씩 외식으로 맛있는 음식을 먹었는데, 다시 한 번만 더 먹었으면 좋겠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이 목사의 활동 시기는 '일본의 사과가 있을 때 까지'다. 그는 "위안부 문제가 왜 거론되느냐, 일본 정부가 과거에 대한 사과, 배상은커녕 역사를 왜곡하기 때문"이라며 "최근 불거진 경제보복만 봐도 군국주의 부활이란 야욕이 훤히 드러난다. 일본이 반성할 때까지 내 인생을 바친다"고 밝혔다.

이 목사는 지금도 평화·인권실현을 향해 묵묵히 걷고 있다. "평화의 소녀상은 가장 평화적으로 역사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면서, 일본에 저항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저와 시민은 독일에 두 번째 평화의 소녀상을 건립하려고 준비 중입니다."

/김현우 기자 kimhw@incheonilbo.com


▲이주현 목사는

1959년 포천시 이동면 노곡리에서 태어난 이주현 목사는 어린 시절부터 목사의 꿈을 품고 신학을 공부했다. 1994년 목사가 된 이후 평화·인권활동에 발 벗고 나섰다. 수원 지역에서 언론의 자유와 역할을 위해 활동하기도 했다. 2018년 위안부 피해자 명예회복을 위한 '수원평화나비' 단체의 상임대표를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