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호 경기도의원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이야기한다. 지리적으로는 어느 국가보다도 가까우나 정서적으로는 매우 멀게만 느껴지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는 정유재란, 임진왜란, 근대의 일제강점기를 거쳐 최근 경제 보복으로 인해 더욱더 멀다는 것이 확인됐다.
경제 보복은 우리에게 그동안 잊었던 친일 문제를 되짚는 계기가 됐다. 사실상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해방 후 대한민국이 가장 실수한 것이 친일청산의 실패다. 일본이 한국의 경제를 다시 짓밟으려 하고 이를 옹호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친일 청산의 중요한 이유가 된다.

친일이란 무엇인가. 그 어떤 견제도 불가능하고 언제든지 노골적으로 폭력으로 전락할 수 있는 무법 권력에 대한 부역 행위이다. 어느 일간지에서 정의한 친일의 개념이다. 식민지배는 이민족의 지배로 내재적으로 폭력적이다. 그러기에 부역은 필연적인 지배 형태로 이를 다스리는 과정에서 폭력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폭력이 수반되고 부역자는 그 폭력을 대행함으로써 확대 재생산된다. 일제 식민지배 기간, 일제는 물론 부역자를 통한 폭력이 식민지 백성에게 일상이 되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폭력적 지배 체제가 해방되면서 사라지지 못했다. 친일청산을 하지 못함으로써 부역자들과 그 잔재들은 그대로 우리 사회 각계각층에 권력을 승계하면서 자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폭력이 일상화됐다. 부마항쟁, 5·18 민주화운동, 6월 항쟁 등을 거치면서 친일의 문제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권력형 폭력을 일상화하는 것이 친일파 문제의 핵심이다.

이명박 정권하에 철거민을 폭력으로 진압한 용산참사와 박근혜 정권하에서 벌어졌던 백남기 농민의 사망이 식민지 백성에게 벌어졌던 폭력과 무엇이 다른가. 다만 다르다면 식민 지배 기간은 이민족으로부터 폭력을 당했지만 지금은 그 폭력을 답습한 자국민으로부터 폭력이 가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기에 일제 잔재 청산이 꼭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는 식민지배하의 폭력을 답습한 부역자들로 인해 그 폭력이 자국민에게 확대 재생산되기 때문이다.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일본의 경제보복과 관련해서도 일부 단체와 언론, 친일 부역의 잔재들의 논조는 폭력이 내재화되는 과정이다. 폭력이 언어에 논리적 당위성을 담아 일본의 경제적 침략을 정당화하고 이를 자국의 정부나 자국민 탓으로 돌리는 이들을 보면서 일제강점기 부역자가 자국민을 대상으로 폭력을 대행한 것과 무엇이 다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러기에 우리 사회가 미래지향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라도 일제 강점기의 흔적과 친일잔재, 부역자들과 그 역시 철저하게 청산되어야 할 가장 큰 이유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경기도가 발표한 친일 문화 잔재 청산을 위한 연구 용역은 매우 긍정적이다. 다소 아쉬운 부분은 문화 잔재 청산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해방된 지 70년이 흘렀으나 곳곳에 친일의 흔적이 남아 있다. 생활 속의 일제 잔재 청산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식민수탈과 민족정신 말살, 통치의 편의를 위하여 단행한 '창지개명(創地改名)'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일제가 왜곡한 지명 외에도 유형 문화, 생활 문화, 제도와 의식, 교육, 문화예술, 문화산업 등 우리 일상생활 거의 모든 분야에 일제 잔재가 여전히 존재한다.

따라서 일제강점기의 친일문화 잔재 청산 과정에서 우리 일상생활 속의 일제 잔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가능한 범위 내에서 이를 청산하는 작업도 중장기 과제로 병행 추진되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그 갈림길에 서 있다. 수 천 년 동안 나라를 잃고 방황했던 유대 민족과 집시 민족의 갈림길이다. 생물학적으로는 두 민족 다 조상들로부터 생명을 부여받았으나 역사의 생명력을 지닌 유대민족은 국가를 세웠으나 역사를 상실한 집시 민족은 세계에 흩어져 타 국가에 흡수되어 문화적 이질감 등으로 지금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신채호 선생의 말이 오늘 더욱더 깊이 있게 들리는 이유다. 이제 우리는 광복 이후 한국사회의 원죄라 할 수 있는 식민지적 구조, 친일 인사들에 대한 청산이야말로 낡고 병든 과거와 단절하고 새로운 대한민국과 경기도의 100년을 시작할 수 있는 마지막 시점에 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