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면서 기댈 곳이
허공밖에 없는 나무들은
믿는 구석이 오직 허공뿐인 나무들은
어느 한쪽으로 가만히 기운 나무들은
끝내 기운 쪽으로
쿵, 쓰러지고야마는 나무들은
기억한다, 일생
기대 살던 당신의 그 든든한 어깨를
당신이 떠날까봐,
조바심으로 오그라들던 그 뭉툭한 발가락을



달포 전 한 유명배우가 지방공연 중 돌연히 호텔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기사가 뜨더니, 또 며칠 전엔 혼자 살던 중년의 한 유명시인이 사망한 지 보름이 지나 발견되었다는 기사를 접했다. 유명인이기에 네이버 머리기사로 소식을 접할 수 있었으나 보통 사람들의 자살이나 고독사 같은 죽음이었다면 미미한 파장만을 남긴 채 묻혀버릴 것이 틀림없다.
사람이 목숨을 버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겠지만, 채 쉰이 안 된 젊은 나이에 그들은 무슨 연유로 홀로 죽음을 맞아야 했을까. 그리고 그들이 생전 기대고 있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혼밥, 혼술, 혼놀, 혼행 등의 신조어가 생긴 지는 꽤 오래되었다. 그러한 문화가 사회의 한 축이 된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으나, 인간은 본질적으로 서로 어깨를 기대고 의지하며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임을 부인하지 못한다.

나무들은 허공밖에 기댈 곳이 없으나 인간에겐 사람이라는 든든한 어깨가 있어 조바심 속에서라도 희망이라는 것을 놓지 않고 살아낼 수 있다.
허공이라도 기댈 곳이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다. 허공조차 기댈 곳이 없는 사람들은 절망에 빠져 자포자기 속에서 삶을 함부로 다룰 수밖에 없다.

과거의 따뜻한 정과 사랑은 하루가 다르게 팍팍해지고 개인화되어 가는데 무엇 하나 기댈 곳 없는 사람들의 극단적 선택을 바라보는 심정은 인간으로 태어난 자만이 공유하는 실존적 충격을 불러오기에 충분하다.
이덕규 시인의 '허공'은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게 한다. 나는 과연 누구에게 기대고 있는가? 나는 내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댈 든든하고 따뜻한 어깨가 되고는 있는가? 언젠가는 나도 내가 기대고 있는 곳으로 쿵, 쓰러질테지만 쓰러지고 나서 그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기대고 있었던 것이 사람인지 허공인지.

/권영준 시인·인천 부개고 국어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