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종 인하대 일본언어문화학과 교수

한일 간의 감정싸움이 극으로 치닫고 있다. 그간의 양상과는 사뭇 다르다. 이제껏 일본은 과거의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하면 자국의 잘못을 축소하거나 일부 부인하려고 들었지만 큰 맥락에서 한국의 지적에 수긍하면서 적반하장식의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다. 일부 정치가의 망언이나 우익들의 반한시위가 이어지고 있지만 많은 일본인은 한국인에 대해 사과하는 마음으로 대해온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근래에 들어와 일본의 태도가 싹 바뀌었다. 과거를 합리화하려는 일본 정치가들의 끊임없는 시도와 맞물려 전후세대의 일본인은 한일 과거사 문제에 관심이 없으며 한국인의 비판에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또 한류를 찾듯이 좋으면 열광하고 싫으면 무관심해 하면서 그저 현재의 한국을 보고 즐기려는 풍조를 보이고 있다.
양국 관계의 건전한 미래를 말하면서 잘못 단추를 끼운 한일 간의 협정이나 합의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은 양국 관계를 가로막으며 감정싸움을 낳고 정치적 책략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미래를 위한 우호협력은 양국의 응어리가 배제된 상태에서 시작해야 이룰 수 있다는 주장이 많다. 진정한 협력을 위해 과거의 문제는 어떻게든 양국 스스로가 풀어내며 좀 더 담담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태도가 용납할 수 없는 것이라면 양국의 협력 관계를 말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용서할 수 없는 나쁜 자와 도모하는 미래에 신뢰가 생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과거사 문제를 둘러싼 갈등 속에서도 한일 양 국민은 서로를 받아들이며 건전한 교류를 통하여 양국 관계의 새로운 역사를 써가고 있다. 그런데 금번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로 그간 수면 하에 있던 해묵은 감정이 재점화되어 양국이 서로 자국의 정당성만을 주장하는 모양새를 연출하고 있지만, 양국 모두 하루빨리 원만히 해결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설령 지금의 사태를 잘 풀어내지 못하고 양국 어느 한쪽이 승리한다 한들 서로 이웃에 힘겹게 싸워야 할 국가를 두는 형세로 전락할 뿐이다.
파국을 두려워하지 않는 듯한 양국 정부의 대응은 안 된다. 국익도 국민이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주장함이 옳다. 소수의 권익을 부르짖는 이 시대에 서로 상대국을 생활터전으로 삼는 양 국민이 매우 많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그 누구에게도 피해나 두려움을 주는 상황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일본의 수출규제가 한국의 원인 제공 탓이라는 주장에 냉정하게 대응하면서 합리적인 해결 방안도 모색해야 한다.

한국은 한국의 판단이 옳다하고 일본은 일본의 판단이 옳다하며 평행선을 긋는 주장만이 계속된다면 사태 해결은 쉽지 않다. 정치 문제를 경제 문제로 화풀이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지만, 이미 사태가 감정을 앞세운 명분 싸움으로 번진 상황에서 일본의 조치가 잘못되었으니 시정하라는 요구만으로 해결책을 찾기는 어려워 보인다.

미국의 중재나 타국에 벌이는 외교전도 미봉책에 그칠 수 있다. 한일 간의 문제는 한일이 풀어야 한다. 전쟁이라도 하여 양국 모두 거덜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사태 해결을 위한 지혜를 모아야 한다.
일본정부는 자국 기업의 피해를 받아들일 수 없다하고, 한국정부는 사법부의 판결에 따라 진행되는 징용피해자들에 대한 배상 절차를 막을 권한이 없다하니 한일 양측의 입장을 살려내는 방도를 찾아내야 할텐데 양국의 양보 없이 묘안을 찾기란 힘들어 보인다.

한일청구권협정을 피 토하는 심정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당시 국민들의 자존심을 생각하면 청구권협정으로 받은 돈의 성격을 논하는 것 자체가 치욕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한국정부가 이미 이뤄진 사법부의 판단을 뒤집을 수는 없는 만큼 대법원의 판결과 징용피해자들의 요구에 따라 이뤄지고 있는 일본기업의 자산매각 절차를 신속히 진행해 배상을 마무리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일본기업의 손실분을 한국 정부가 일본기업에 되돌려준다면 양국의 입장을 수용하는 절충안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한일 관계 긴 호흡으로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