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경 사회부장

학창시절 학교에서 배웠던 임진왜란(壬辰倭亂)은 내게 있어 유독 치욕적이었던 역사기록으로 기억된다. 그도 그럴 것이 1592년 4월 왜군은 명나라로 가는 길을 내 달라며 쳐들어왔고 20여일 만에 한양을 점령하고 왕은 피난을 떠났다. 왜군은 잔인하기 그지 없었다. 조선인들의 코와 귀를 베어오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일본 교토에는 높이 약 9m의 귀 무덤이 있다고 한다.
우리 문화재도 많은 약탈을 당했다. 도자기와 도공은 물론 다양한 문화재가 일본으로 빼앗겼다. 일제강점기를 제외하고 가장 굴욕적인 일본의 도발이었던 셈이다. 임진왜란, 일제강점기 이후에도 줄곧 우리 옆에 있는 일본은 한국을 끊임없이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40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좀처럼 두 나라는 가까워지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도 일본의 수출규제 선언으로 또다시 한국과 일본 간 총칼 없는 전쟁이 시작되고 있다. 경제를 볼모로 한 일본의 시비에 우리나라 국민들까지 반발하며 이른바 전쟁에 기꺼이 참여해 치를 준비가 한창이다. 일본 역시 여기에 맞불을 놓으며 총과 칼, 탱크는 없고 국경도 넘지 않았지만 규제, 명분, 여론 등을 이유로 각 국에 치명타를 주기 위한 싸움이 한창이다.
대표적인 것이 '노노재팬'이다. 일반 국민들이 직접 참여해 일본제품과 이를 대체할 제품 정보를 소개하는 사이트다. 일본 제품 밑에는 이를 대신해 쓸 수 있는 국산 제품이 올라와 있다. 국산 제품도 직접 추가할 수 있다. 국내에서도 널리 알려진 유명 일본 의류 매장앞에서는 1인 시위가 이어지고 있는데다가 일본차 판매장에서도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SNS를 통한 분위기도 심상치않다. 일본 제품 및 여행 불매를 넘어 도쿄 올림픽 반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1919년에는 졌지만 2019년에는 반드시 이기겠다' '독립운동은 못했지만 불매운동은 한다' 등이 SNS 상에서 확산되면서 비장한 분위기까지 연출되고 있다. 이들 모두 임진왜란 때 활약했던 의병처럼 자발적인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현 상황을 임진왜란에 빗대어 총칼 없는 기해왜란(己亥倭亂)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현재 한일 간 무역전쟁은 양국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 뻔하다. 국제 신용평가사와 투자은행 등이 한국과 함께 일본 경제에도 악영향을 줄 것이라는 전망을 잇따라 내놨다. 이런 피해를 감내하고도 일본은 내부 정치를 위해 이를 기꺼이 활용하고 있다. 분열된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영주들로 하여금 영토확장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장악하려 했다는 설을 고려할 때 내부정치에 이용한 것과 흡사하다.
한국과 일본의 경제 격차는 40여년 사이 크게 줄었다. 국내총생산(GDP)의 경우 1983년 한국과 일본의 격차는 20배였다. 2018년에는 일본이 3위, 한국이 12위로 일본과 우리나라 간 격차는 3배로 좁혀졌다. 그러나 최근 한국의 대응은 아쉬움이 크다. 최첨단 기술과 자원의 해외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 이야기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끊임없이 관련 기술 국산화와 규제 철폐를 통한 지원 및 육성을 통해 내실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았지만 그저 말뿐이었다. 수 십년째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개선은 없었던 셈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년 전, 이이는 군사를 길러 외부 침략에 대비하자고 주장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이의 이 건의가 받아들여졌다면 임진왜란은 어떻게 흘러갔을까. 우리 영토가 더 넓어졌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일본 수출규제에 대한 대안으로 '일본과의 기술격차를 줄이자' '기업의 기술 개발을 저해하는 각종 규제를 철폐하자'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상생할 수 있는 전략을 짜자' 등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계속돼 왔던 이 뻔한 대안들이 10년 전부터 착실하게 진행됐다면 어떻게 됐을까. 일본은 한국 경제에 치명타를 날리지 못할 수출규제 카드를 꺼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일본이 수출규제를 강행했다면 우리 경제 영토는 이를 기회로 혹 더 넓어졌을 지도 모른다.
'총력대응'이라는 말이 난무하고 있지만 과거를 돌아볼 때 혹시 이번에도 위기만 느낀 채 실질적인 실행 없이 시간만 흘러 보내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일본을 떠나 우리나라와 기술격차를 바짝 줄이고 있는 중국도 또 다른 위협 대상이다. 퇴로는 더 이상 없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자는 말들이 나온다. 이번을 기회로 더욱 탄탄한 한국 경제를 만들자는 의미다. 한편으로는 준비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말도 있다. 우리는 지금 위기를 기회로 만들 준비가 돼 있는가. 시간은 또다시 계속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