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여디여 음음여라/여라 어믹기여라/으이여 여-/으이여 여-/으이여허 여허-/어이기어허 두루나/나일다 나니여/찬일다 찬니여/난일구나 나니요/어어어으어 어기디엇차/두루나니 나니엿차」 끊어질 듯 이어질 듯 계속되는 소리속에 비릿한 바다내음이 묻어나온다. 웃옷을 벗어젖히고 줄 꼬기에 여념이 없는 바닷가 사람들 땀냄새가 배어나온다.

 올해 여든여덟된 소인식옹(인천시 남구 주안7동, ☎873-9658)은 인천시 지정 무형문화재 제5호 주대소리 보유자다. 주대소리는 바닷가에서 쓸 줄을 꼬면서 부르던 일노래. 『옛날에는 줄을 짚이나 칡으로 굵게 꼬아 썼지. 봄이 되면 동네사람들은 뭍에서 밤새 줄을 꽈. 줄종류는 닻줄, 앙금줄, 아메줄, 버리줄 여러가지지. 그때 힘든 걸 이겨내고 단합심을 높이기 위해 주대소리를 부르는거야.』 그렇게 완성된 줄중 가장 굵은 줄은 넓은 바다에 어장을 설치하는데 쓰인다. 한배에 탄 한 조(10명)의 어부들은 12발이나 되는 장나무 수십개를 정확한 치수 만큼 간격을 두고 바다 한가운데 설치한다. 큰 돌 100개씩 담은 망태기를 나무밑둥에 묶으면 나무는 바닷물 속에서 고정된다. 나무와 나무 사이 칸이 48칸. 칸칸이 줄을 매고 대형 그물을 설치해 놓으면 그 사이로 조기떼가 밀려들어가는 방식이다. 요즘은 나일론줄이 있어 수년을 써도 끄떡없지만 당시만 해도 바닷물에 삭고 썩어버려 매년 봄이면 한달 가량은 동네사람들이 힘을 모아 줄을 엮고 그것을 바다로 끌고나가 설치하는 것이 큰 연례행사였다. 주대소리를 하도 힘차게 불러 줄 꼬는 일이 끝나고 나면 모두들 목이 쉴 정도였다.

황해도 옹진군 봉구면 무도리가 고향인 소옹은 16살때부터 어장일을 시작했다. 당시 조선에서 가장 큰 조기어장으로 소문났던 왼돌어장이 바로 소옹집안이 3대째 뿌리내리고 업을 이어가던 곳이다.

 『어장설치는 아무나 못해. 몇 치 건너 기둥을 세우고 그 기둥을 고정시키는 여사줄, 대압줄은 어떻게 설치하고 하는 방식이 다 있어. 철저한 측량이 없이는 어렵기 때문에 머리가 좋은 사람이나 그 일을 할 수 있었지.』 소옹은 6·25로 피난하던 때인 37세까지 동네에서 왼돌어장을 설치하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통일이 되면 가서 설치할 생각에 소옹은 당시 기억을 되살려 그린 어장설계도를 귀하게 간직하고 있다. 몇치 몇척, 안귓버리, 바깥귓버리, 귓장뒤, 알바… 요즘 사람들에게는 생소하기만 한 용어들이 가득 적힌 어장지도를 펼쳐보이며 소옹은 고향냄새 가득 묻어나는 주대소리를 힘차게 불렀다. 그의 방벽 한 켠을 차지하고 있는 그의 고향섬 그림은 그가 10여년전 고향모습을 잊기 전에 남겨놓겠다는 일념으로 그린 것. 매일 그 그림을 보며 소옹은 힘차게 꼰 줄을 배에 싣고나가 바다에 내리던 광경을 떠올리곤 한다.

 『젊은 사람들이 어디 옛날 것 배우려고 해야 말이지. 아들이라도 대를 이어주면 좋겠는데 마다하고….』 배우려는 이만 있다면야 힘이 들어도 소리를 가르칠텐데 세월이 그렇지 못하니 소옹은 1년에 몇차례 인천 수봉공원에서 공연하는 것으로 만족하며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