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이 아니라 영화관이라고 해야 옳겠다. 영화도 극이긴 하나 그곳에서 연극이 아닌 영화를 상영하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 극장들은 모두가 영화상설관이다. 극장이라는 이름은 아마도 영화 이전에 연극을 공연하던 데서 연유할 듯 하다. 그때 인천의 극장은 애관이 유일한 존재였다. 1895년에 개장 남사당패와 연극등을 공연하다가 영화관이 되었다.

 인천의 영화관 역사는 고일씨의 「인천석금」에 비교적 상술하고 있다. 애관의 처음 이름은 협률사였다. 부호 정치국씨가 용동에 창고 처럼 벽돌 집을 지은게 인천 극장의 시초였다. 그후 협률사는 축항사로 이름을 고치고 30년대 정씨의 사망후 김모씨가 인수 홍사헌씨에게 위임 애관으로 다시 개명 연극과 영화의 상설관이 되었다.

 예전의 애관은 지금의 우측 좁은 층계를 올라 용동 골목에 정문이 있었다. 입장하면 정면의 무대가 오늘과 반대로 있었다. 이같은 방위는 6·25전쟁으로 소진 몇차례의 증개축에도 그대로 지켜졌었다. 이곳에서 50년대 악극단과 국극단의 공연도 성하더니 그후 영화전문관이 되었다. 서윤복의 보스턴 마라톤 기록영화와 첫 입체영화인 「타이콘테로가 요새」가 상연된 것도 이곳이었다.

 인천의 영화관으로 애관 말고는 동방 인영등이 있었다. 동방극장은 애관을 인수했던 홍씨가 해방후 직영했다. 동인천역전의 인영극장은 해방전 어린이영화관이라 하여 만화영화등이 주로 상영되었다. 6·25이후 금곡동 성냥공장의 창고에서 문화극장이 그리고 화수동의 인천극장 신흥동의 세계극장등이 문을 열었다. 전란으로 불탄 표관 터엔 키네마극장이 개관 그 기념으로 「볼가의 뱃사공」을 개봉 러시아민요가 금지되던 시절 큰 반향을 일으켰었다.

 애관극장의 주인이 바뀐다고 해서 대서특필되었다. 한 극장의 경영권 교체가 대형뉴스일 것은 없겠으나 그만큼 애관극장은 한세기의 연륜속에 시민과 애환을 함께 하고 역사의 부침과 굴곡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한때의 영상으로 사라지지만 그것을 보여준 애관은 인천영화관의 역사의 실체이다.

吳光哲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