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재경 논설위원

학창시절 우체부 아저씨를 목빼고 기다리던 때가 있었다. 여름과 겨울방학이 시작되면 며칠 동안은 꼼짝 않고 집안에 머물며 온 신경을 대문 밖 소리에 집중하고 우체부 아저씨의 '편지요' 소리만을 기다렸다. 한 학기 시험성적과 학교생활이 적혀 있는 통지표를 부모보다 먼저 받기 위해서였다. 성적이 나쁘면 부모에게 야단을 맞는 것은 당연했고 심하면 방학 내내 문밖 출입을 통제받아야 했다. 부모님 손에 통지표가 쥐어지는 순간 모든 것이 결정됐다. 통지표를 배달하는 애꿎은 우체부 아저씨만 원망했다. 우체부 아저씨들이 일이 너무 많고 힘들어 감당하기 어렵다며 처우개선을 호소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우편업무가 시작된건 1884년 서울에 우정총국이 설립되면서부터다. 인천 중구의 인천우체국도 그때 같이 분국으로 문을 열었다. 135년 역사의 우편업무 최일선에서 일하는 우체부의 공식 명칭은 집배원이다. 편지와 소포 등 우편물을 모아서(集) 배달하는(配) 사람(員)이라는 뜻이다. 체전부, 체주사, 체대감, 우체군, 분전원으로 불리우다 1905년 정식명칭 집배원으로 정해졌다. 우편물이나 무거운 소포를 일일이 집앞까지 배달해야 하는 집배원의 일과 근무 여건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게 없다. ▶집배원들의 과중한 업무와 장시간 노동은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우정노조는 올해에만 집배원 9명이 과로와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사망하는 등 2014년부터 올해까지 집배원 101명이 업무과중으로 숨졌다고 했다. 집배원 사망이 이어지자 우정본부 노사는 민간전문가와 함께 '집배원 노동조건 개선 기획추진단'을 구성, 대책 마련에 나섰다. 실태조사결과 집배원들의 연간 노동시간은 2745시간(2017년 기준)으로 한국 임금노동자 평균 2052시간보다 693시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 1763시간보다 982시간이나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기획추진단은 개선대책으로 정규직 집배원 2000명 증원을 제시하면서 구체적으로 올해에 1000명을 늘리고 이후 단계적으로 나머지 인원을 확보하라고 권고했다. 노사는 토요 배달 폐지에도 합의했다. ▶하지만 우정사업본부는 기획추진단의 증원 권고나 토요 배달 폐지를 이행하지 못하고 있다. 우정노조는 '우정사업본부가 합의 사항을 이행하지 않는다'며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공공성을 앞세워 집배원의 희생만 강요하고 있다고 한다. 우정본부는 우편 물량 감소로 적자가 누적돼 기획추진단의 권고를 수용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물량이 줄어들면서 지난해에는 1450억원의 적자를 냈다고 한다. 결국 예산이 문제다. 취업자 수를 늘리기 위한 빈 강의실 불끄기 일자리 만들기보다 집배원들의 처우 개선을 위한 고민이 더 먼저인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