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집 안에 그늘이 든다고
오동나무를 베어 어슷어슷 담에 기대두었다
베어낸 자리에 도끼날을 박아두고
상복이며 망건을 모아 밖에서 태웠다
지긋지긋하게 죽지도 않더니만
혀를 물고 죽어주마던 말이 귓가에 쟁쟁하다
음복을 하고 입가를 훔치며
망인이 누웠던 방을 열어 거풍을 시켰다
집터가 너무 세니
큰일 치르기 전에 집을 옮기라던 조막손이 말을 허투루 들었다
집안에 키우던 짐승들이 못 배기고 죽어 나가더니
그에 사달이 났다
녹슨 도끼날을 비집고 소담하게 연둣빛 싹이 돋았다
죽은 줄도 모르고 잘린 나무토막마다 싹이 돋았다



요즘에는 대부분 임종을 병원에서 맞이하지만, 옛적 사람들은 거의 자신이 살던 집에서 죽어갔고, 집 가까운 곳에 음택을 했다. 사는 일과 죽는 일은 그리 다른 일이 아니었고, 대부분의 경조사는 자가에서 치뤄졌다. 이 시에 등장하는 누군가도 검질긴 세월 가족과 부대끼며 살다가 제 집에서 쓸쓸히 임종을 맞은 듯하다. 집이 그늘에 덮여 사람이 죽어나갔다고 말하고 있는데, 풍수에 기인한 발상이다. 그래도 살 사람들은 살아서 거풍을 하고 음복을 하며 덕담을 나눈다.
참으로 생명은 질기고 집요하다. 그늘을 만든 죄로 도끼날에 잘린 오동나무는 제 죽은 줄도 모르고 담벼락에 버려진 채 파란 새싹을 틔웠다. 한번 태어난 생명은 누구나 소중한 이름을 얻고 끝끝내 살아내지만, 갑작스레 운명의 도끼날이 삶을 덮치는 순간이 있어, 내키지 않더라도 황당한 죽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 살다가 죽는 일은 삶의 연속선상에서 반드시 일어나는 대형사건 중 하나일 수밖에 없는데, 이 시는 그것을 세상과의 단절이라고 보지 않는다.
소설가 김훈은 '삶과 죽음은 동음이의어'라고 정의한 바 있고, '죽음은 날이 저물고,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것과 같은 자연현상으로, 애도할 만한 사태가 아니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은, 삶이 죽음이고 죽음이 삶이란 말에 다름 아니다. 사람들 또한 세상이라는 그늘 속에 살다가 언젠가는 죽게 되고, 그것은 매우 익숙한 습관처럼 일상화 되어 우리 곁에 빈번히 출몰하곤 한다.
삶의 자기결정권은 공평하게도 모든 생명에게 다 주어지지 않는다. 태어난 것도 죽는 것도 내가 결정한 것은 아니다. 오늘도 누군가는 태어나고, 누군가는 죽고, 어디선간 버려진 나뭇가지에 싹이 틔어 오른다. 저 오동나무가 죽어 싹을 틔우듯 사람도 죽어 일정 기간 추모의 싹을 틔우다 적멸에 이른다. 죽은 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살 때까지 살 것인가, 죽을 때까지 살 것인가.' 웰다잉 십계명 중 한 마디를 곱씹어 볼만 하지 않은가?

/권영준 시인·인천부개고 국어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