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승철 문화체육부장

얼마 전 몇 해 만에 인천의 원로 서예가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연세가 여든을 바라보는 그분은 지금도 옥련동 청량산 자락에 서실(書室)을 두고 후진을 가르치고 자신도 매일 글씨를 쓰며 붓을 놓지 않고 있다며 근황을 밝힌 뒤 예나 지금이나 조용한 어투로 궁금한 게 있다며 말을 꺼냈다.
"인천시는 검여와 동정 선생의 작품을 정말 그렇게 보내야만 했나요. 보도대로라면 유족들의 기증 의사를 무시했다는 게 사실인가요. 혹시 인천으로 되찾아올 방법은 없나요."
"예. 아쉽게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인천시에서는 경위를 알아보고 재발 방지를 논의했지만 안타깝게도 현재로는 두 분의 작품을 인천으로 다시 가져올 방법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아 보입니다."
검여(劍如) 유희강(柳熙綱 1911∼1976) 선생과 동정(東庭) 박세림(朴世霖 1925~1975) 선생은 인천출신으로 한국 근대 서예를 대표하는 작가들로 꼽는데 누구도 주저하지 않는다.
검여 선생은 지금의 인천 서구 시천동에서 출생했다. 그의 선대들은 16세기부터 서구 시천동과 검단 오류동, 김포 당하동 일대에서 살아온 유서 깊은 가문이다.
조선 후기의 문인이자 명필가이며 대 실학자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잇는 한국 최고의 명필이라 평가받는 검여 선생은 1962년 '검여서원(劍如書院)'을 열어 후배들을 지도해 오던 중 1968년 뇌출혈로 인한 오른쪽 반신마비 상태가 됐지만 병고가 그의 예술혼은 꺾지 못했다. 왼손으로 서도(書道)에 정진하며 완성한 좌수서(左手書)로 1971년 개인전을 열어, 보는 이의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숙연하게 만들었다.
한국서예가협회 회장과 인천시립도서관 관장, 인천시립박물관 관장 등을 지낸 검여의 대표작으로 길이만 34m에 이르며 3024자의 빼곡한 글자가 압도하는 '관서악부(關西樂府)'는 검여를 '신필(神筆)' 또는 '국필(國筆)'로 칭하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하지만 검여의 작품과 자료 등 유물들은 인천에 없다. 유족들이 검여의 작품을 인천시에 기증하겠다는 뜻을 오래전부터 수차례 밝혔지만 시의 외면으로 최근 습작 600점과 작품 400점 등 1000점과 생전에 사용했던 벼루, 붓 등을 성균관대학교에 기증했다.
인천 강화출신으로 검여와 함께 대한민국 10대 서예가로 선정되던 서단(書團)의 큰 봉우리로 우뚝 솟은 동정 박세림의 작품과 유품 역시 비슷한 이유로 인천을 떠나 대전대에서 보관, 전시 중이다.
이처럼 인천이 낳은 당대의 서예 거장인 검여와 동정의 국보급 작품이 정작 인천에 안착하지 못한 이유가 예술작품이나 문화유산에 대한 인천시의 안목이 부족한 탓이고, 작품을 보관할 '수장고' 부족이라는 안일한 핑계에 매달리는 인천시의 문화정책 탓이라니 헛헛한 마음뿐이다.
"안목이 부족하면 굳이 인천이 아니더라도 유명 서예가나 문화예술계의 전문가들에게 의견을 물어볼 방법은 없었나요. 수장고가 부족하면 새로 지으려는 시립박물관이나 시립미술관이 완공될 때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등에 의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볼 수도 있었을 텐데요. 서예란 서도라고도 하잖아요. 서예는 글씨를 쓰며 자기의 사상과 감정을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이며, 예로부터 선비는 서도로 마음을 가다듬는다고 했어요. 인천은 검여와 동정의 '예(藝)'는 물론, 유족들에 대한 '도(道)'를 함께 외면하고 잃어버렸어요."
오죽하면 오랜만에 통화한 한참 어린 후배에게 하소연이라도 하려는 심정이었겠지만 조용하지만 떨리는 목소리는 아직도 귓전을 맴돌고 불현듯 인천 연평도 출신의 요절 시인 기형도의 시 '빈집'의 한 구절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를 읊조리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