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수리 마수리 … 그의 손만 닿으면 뚝딱
▲ 오늘도 가전제품을 수리 중인 김상기 장인은 "나보다 남을 먼저 위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라며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가짐에 대해 강조했다. /이성철 기자 slee0210@incheonilbo.com

 

▲ 이웃 물건 고치다 새끼손가락 한마디가 절단된 그의 손. 세월의 흔적이 엿보인다. /이성철 기자 slee0210@incheonilbo.com

 

▲ 김 장인의 집 앞마당에 동네 주민들이 수리를 맡긴 가전들이 줄지어 놓여있다. /이성철 기자 slee0210@incheonilbo.com

 

 

살려고 배운 손재주
12살 부모잃고 무작정 상경
숙식 제공 가구회사 들어가
50년간 목수·건축설비 배워

취미가 나눔으로
고된 삶에 병 얻어 요양왔다
이웃들 가전·보일러 고쳐줘
어느새 동네 '만능금손'으로


5분이면 뚝딱 버려진 쓰레기가 새 생명을 얻어 쓸모있는 물건으로 바뀐다. 척 보면 딱, 드라이버 한 자루만 있으면 고치지 못하는 물건이란 없다. 경기도 용인 미평리에 소문난 맥가이버가 있다. 황금 손을 가진 사나이, 김상기(72) 장인을 18일 만났다.

#무엇이든 고친다

"어이, 김가야 선풍기가 안 돌아가.", "김 총무, 우리 집 형광등 나갔어."

용인 원삼면 미평리 마을 주민들은 물건이 고장나면 서비스센터에 전화하기 보다 김상기 장인을 먼저 찾는다. 덕분에 그의 집 앞마당은 수리를 맡긴 가전제품들로 가득 차 있다. 밥통이며, 선풍기, 우산, 가스레인지, 전자레인지 등 종류도 제각각이다. 온갖 고장난 살림살이란 살림살이는 모두 김 장인네 집으로 가져온다.

"버려진 전자제품을 가져다 취미 삼아 한 두 개 고쳤는데 재미있더라고요. 앞집 밥통을 고치고, 옆집 선풍기를 고치면서 소문이 났는지 다들 고장난 살림살이를 들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마을에서 김상기 이름 석 자만 대면 모르는 이가 없다. 고장난 가전제품을 수리하는 것은 물론, 전화 한 통이면 이웃 집으로 즉각 출동해 문고리부터 수도꼭지, 전등 교체, 수리가 까다로운 보일러까지도 한방에 해결해준다. 그런 그를 주민들은 '미평리 맥가이버'라 부른다.

"12살 때부터 목수 일을 해왔고 건축, 설비 일에 오랜 세월 종사했습니다. 2년여 전 용인에 터를 잡으면서 마을 주민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다가 평생 업으로 삼았던 기술을 살려 물건을 고치기 시작했죠."

어느 덧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된 그는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될 때까지 굴곡진 삶을 살아왔다.
전라북도 부안에서 나고 자란 김 장인은 12살 되던 무렵, 일찍이 부모님을 여의었다. 당시 가진 돈을 몽땅 털어 어린 그는 서울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졸지에 오갈 곳 없는 신세가 된 김 장인이 서울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숙식 제공되는 거처를 찾는 일이었다.

#고달픈 삶으로 얻은 병

"월급이고 뭐고 재워주고 먹여 주기만 하면 어디든 상관없었습니다. 노숙 생활을 전전하다 우연히 의정부의 한 가구 회사에서 목수 일을 하게 됐습니다. 워낙 어린 나이인지라 잔심부름을 하거나 허드렛일을 하는 것이 시작이었죠. 한 해 옷 한 벌 얻어 입으면 그걸로 1년 벌이는 끝이 났습니다."

해가 지날수록 김 장인의 기술은 빠르게 성장해 갔다. 군에 입대하기 직전까지 가구 목수 일을 하며 10여년을 지내왔다. 일하는 동안 동료 목수들에게 두들겨 맞거나 다치는 일이 비일비재했지만 의지할 피붙이 한 명 없던 그에겐 눈물을 흘리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그때 만해도 목수라는 직업은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은 아니었습니다. 대장 목수의 월급이 지금으로 치면 쌀 한 가마니 값 정도였으니 막내 목수들이 벌 수 있는 돈은 훨씬 적었죠. 맨날 두들겨 맞고 어디 구석에 쳐박혀 울기 일쑤였지만 나중엔 그럴 시간이 없을 만큼 바쁘고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전역 이후, 그는 아내를 만나 단란한 가정을 꾸리게 됐다. 두 아들이 태어나고 가장이라는 책임감이 무거워질수록 목수 임금은 턱없이 적었다. 그때부터 품삯을 많이 쳐준다 말에 건축일을 시작했다.

"식구가 늘어나니 목수 일로는 택도 없더라고요. 그래서 시작한 게 보일러나 환풍구 수리 같은 건축설비일이었습니다."

24살 때부터 시작한 설비일은 일흔이 다 된 나이까지 꼬박 50여년을 해왔다. 오직 가정만을 위해 뒤도 안 돌아보고 숨 가쁘게 달려왔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주어진 보상은 가혹했다.

"일흔이 가까워질때까지 쉬지 않고 일해왔죠. 그러다 패혈증을 앓게 됐습니다. 지병이 든 것도 그리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하던 일을 모두 그만두고 건강을 위해 휴식하러 내려온 곳이 미평리입니다."

#평생 업이 나눔으로

2년 전 지병을 얻게 된 그는 요양을 이유로 용인에 오게 됐다. 김 장인이 미평리를 택하게 된 데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마을 초입에 서있는 불상을 봤습니다. 용인 문화 유적으로 등록된 약사여래입상을 보고 여기다 싶었지요. 부처님의 보살핌이 지병을 낫게 해 줄 거란 믿음이 생겨 미평리로 오게 됐습니다."
미평리에 온 뒤에도 일평생 몸을 써 온 탓인지 가만히 병상 생활을 하자니 도리어 병을 얻는 듯 했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 온 것이 있었다.

"길가에 꽃을 심으면서 공공근로 일을 하다 보니 버려진 가전제품들이 보이더라고요, 왜 멀쩡한 것을 버렸을까 싶어 집으로 가져와 사용해 보면 고장이 나있더군요. 재미삼아 뜯어봤더니 고칠 수 있겠더라고요. 그때부터 물건을 고치는 일이 유일한 취미가 됐습니다."

김 장인의 손재주는 금세 이웃주민들에게 알려졌다. 이웃들은 고장난 물건이 생길 때마다 그에게 가져왔다.
"남의 동네에 녹아 들려면 최소 3년은 지내야 한다잖아요? 물건을 고쳐주다 보니 2년 만에 저를 마을회관 총무 자리에 앉혀 주더라고요(웃음). 취미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마을주민들에게 내가 배운 기술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니 보람도 되고 기쁩니다."

남들보다 한 마디 부족한 그의 손가락도 이웃들의 물건을 고치는 과정에서 얻은 상처다. 이웃의 고장난 물건을 고치기 위해 커터기를 사용하다가 새끼손가락이 절단되는 사고를 당했다.

그런데도 마을 일이라면 누구보다 앞장 서 달려드는 김상기 장인에게 오래도록 고수해 온 철칙 한 가지가 있다.
"남한테 피해주지 않고 나보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가짐을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결국 남에게 한 선의의 일들은 언젠가 나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법이거든요."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