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인천을 읽다] '나'라는 말
[시, 인천을 읽다] '나'라는 말
  • 인천일보
  • 승인 2019.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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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보선  

나는 '나'라는 말을 썩 좋아하진 않습니다.
내게 주어진 유일한 판돈인 양
나는 인생에 '나'라는 말을 걸고 숱한 내기를 해 왔습니다.
하지만 아주 간혹 나는 '나'라는 말이 좋아지기도 합니다.
어느 날 밤에 침대에 누워 내가 '나'라고 말할 때,
그 말은 지평선 너머 떠나온 고행처럼 느껴집니다.
나는 '나'라는 말이 공중보다는 밑바닥에 놓여 있을 때가
더 좋습니다.
나는 어제 산책을 나갔다가 흙 길 위에
누군가 잔가지로 써 놓은 '나'라는 말을 발견했습니다.
그 누군가는 그 말을 쓸 때 얼마나 고독했을까요?
그 역시 떠나온 고향을 떠올리거나
홀로 나아갈 지평선을 바라보며
땅 위에 '나'라고 썼던 것이겠지요.
나는 문득 그 말을 보호해주고 싶어서
자갈들을 주워 주위에 빙 둘러 놓았습니다.
물론 하루도 채 안 돼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어서
혹은 어느 무심한 발길에 의해 그 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요.
나는 '나'라는 말이 양각일 때보다는 음각일 때가 더 좋습니다.
사라질 운명을 감수하고 쓰인 그 말을
나는 내가 낳아 본 적도 없는 아기처럼 아끼게 됩니다.
하지만 내가 '나'라는 말을 가장 숭배할 때는
그 말이 당신의 귀를 통과하여 당신의 온몸을 한 바퀴 돈 후
당신의 입을 통해 '너'라는 말로 내게 되돌려질 때입니다.
나는 압니다. 당신이 없다면, 나는 '나'를 말할 때마다
무(無)로 향하는 컴컴한 돌계단을 한 칸씩 밟아 내려가겠지요.
하지만 오늘 당신은 내게 미소를 지으며
'너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나는 압니다. 나는 오늘 밤, 내게 주어진 유일한 선물인 양
'너는 말이야', '너는 말이야'를 수없이 되뇌며
죽음보다 평화로운 잠 속으로 서서히 빠져들 것입니다.


▶ '나'라는 말에 담긴 그 막막함과 애잔함을 이 시는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나'라는 말을 표현하기조차 버거워 누군가 "잔가지로 써 놓은 '나'라는 말". 시인은 그 많고 많은 감정을 다 뒤로 하고 그저 "자갈들은 주워 주위에 빙 둘러"놓는 것으로 그 말을 보호하려 한다. 그럼에도 '나'라 말할 때는 "무(無)로 향하는 컴컴한 돌계단을 한 칸씩 밟아 내려가"는 것이다. "당신이 없다면" 말이다. 당신의 온몸을 한 바퀴 돈 후 다시 당신의 입을 통해 '너'라는 말이 들릴 때. 시인은 '너는 말이야'라는 말을 되뇌며 "죽음보다 평화로운 잠 속으로" 서서히 빠져들고 있다. '너'와의 관계 속에서 '나'의 존재가 확인되는 순간이며 또한 진정한 평온을 맞는 순간이기도 하다. '나'라는 말을 이보다 더 절실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권경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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