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직이 사랑을 읊조리다
▲ 류병구 지음, 다할미디어, 144쪽, 9000원.
'맑은 개천 웃동네 ㅁ자 한옥마을/ 궁한 샌님들 남촌 보다 꽤 대궐인 줄 알았더니/ 옹색한 여염집 안방에/ 콩댐 비릿한 장판내가 물큰하고/ 막사발 엎어 초배바닥 수도 없이 문지르던/ 젊었을 적 어머니를 거기서 뵈었더라/ 완자 문살 미닫이/ 당신 입에다 물 불룩하게 담아/ 푸 푸 뿜어 팽팽해진 문창호지/ 그 속에 손수 말려 깔았던 단풍잎 서너 이파리에/ 문뜩 가슴이 저리더라/ 조막만한 아랫뜰에 채송화, 백일홍이 한창인데/ 맞배지붕 날렵한 곡선 휘감아/ 백악 산줄기 저 쪽/ 서촌으로 번지는 노을도/ 그 꽃빛이더라' ('북촌에서' 전문)

가천대 교수를 지낸 류병구 시인이 새 시집 <낮은 음역의 가락>을 냈다. <달빛 한 줌>과 <쇠꽃이 필 때>에 이은 세 번째 시집을 통해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기저는 '겸손'과 '사랑'이다.

어디서나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남의 말을 경청하는 겸손함이 있다. 경직되고 오만한 부정적 계열의 정신들은 되도록 배제하고, 정감어린 70여 시편들을 낮고 온화한 터치와 은유, 역설적 기법으로 펼쳐간다.
시의 소재는 주로 꽃, 산, 섬처럼 가공되지 않은 자연과 절기 그리고 가족, 이웃 등을 주요 대상으로 삼는다. 불문학을 공부한 유교철학자 류병구 시인의 내면적 성향과 가치의식을 '낮은 가락'을 통해 엿보게 한다. 그런 사유의 물줄기는 고궁과 사찰, 유적지에서 찾아지는 오래된 시간에 민감하고, 인류가 오래전부터 지혜의 원천으로 삼아온 종교들도 겸허하게 다룬다.

전 편에 흐르는 풍요한 시어들은 '후미진 피곤, 붉은 눈물, 고적한 현란, 순백의 생피'처럼 이질적인 품사들을 결합하는 복합감각이나 모순어법, 낯설게 하기 같은 시적 기법들로 충만해 있는데, 그의 이미지들을 따라가노라면 영락없이 모더니즘 계열의 시, 그 중에서도 이미지스트 시인들을 떠올리게 한다.

마경덕 시인은 해설에서 "온실에서 키운 화초와 들에서 자란 들꽃의 향기가 다르듯이 류병구 시인의 시속에는 '생생한 날것' 그대로의 냄새가 배어있다. 그것은 마치 오래된 다기에 새겨진 수많은 실금을 '시간의 무늬'라고 인정하는 것과 같다. 공장에서 갓 태어난 찻잔에는 단순한 아름다움만 있을 뿐, 수없이 찻물을 우려내던 체취와 향기가 없다. 시간의 흔적이 내려앉은 묵은 찻잔에는 형용할 수 없는 그리움의 깊이가 있다. 옛 자취를 들춰 전통성을 추구하는 류병구 시인의 시는 그런 맥락으로 읽어야 한다"고 밝혔다.

류 시인은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청주고등학교와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를 졸업했다. 같은 대학원 석사과정에서 불문학,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석·박사과정에서 유교철학을 공부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을 거쳐, 가천의과학대학교(현 가천대학교)에서 윤리학을 가르치고 정년 퇴임했다. <월간문학> 시부문으로 등단했다.

/여승철 기자 yeopo99@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