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 

부산박물관에서 열렸던 서영해(徐嶺海)의 일생을 조명하는 '파리의 꼬레앙…유럽을 깨우다'라는 전시회는 독립운동 역사 속에서 오랜 시간 비켜서 있었던 프랑스에서 활동한 부산출신 독립운동가의 일생을 살펴보는 뜻있는 계기였다. 1902년 부산 초량동의 한약방집에서 태어난 그는 3·1운동에 참가한 후 18세의 나이에 중국 상해로의 망명길에 올랐다. ▶상해 임시정부를 찾아간 서영해는 나이도 제일 어리고 체구도 작았음에도 불구하고 임정 요인들에게 독립운동 의지를 단호하게 표명했다. 당시 국제 외교무대의 중심이었던 파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된 후 유럽에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파리유학을 결심하게 된다. 중국인 양자가 되어 중국여권을 얻어 파리에 도착한 그는 프랑스어를 정식으로 배우기 위해 리세(정규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대학으로 진학했다. ▶프랑스에서 정규 고등교육과정을 끝낸 서영해는 1929년 7월 파리에서 열린 제2회 반제국주의세계대회 참가를 계기로 본격적인 독립운동가의 길을 걷게 된다. 같은 해 임시정부 외무부 지시로 파리에 사무실을 얻어 고려통신사를 설립하고 유럽 여러 나라를 대상으로 독립운동과 외교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상해 임시정부는 그에게 1934년에 프랑스주재 외무위원을, 2년 후에는 특파위원의 임무를 맡겼다. ▶서영해는 프랑스에서 상해 임정의 유럽주재원으로 독립운동만 한 것이 아니라 한국인 최초로 프랑스어로 <어느 한국인 삶의 주변>이라는 장편소설과 단편소설들을 집필했고 한국 전통 민담들도 프랑스에 소개했다. 임시정부의 김구와 이승만과도 긴밀한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신뢰를 얻은 그는 1932년 상해 홍구공원에서 윤봉길 의사의 폭탄투척 의거 후 도산 안창호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자 맹렬한 석방교섭을 통해 외교적 성과에도 기여했다. ▶미국이나 중국과는 달리 교민들이 거의 없던 유럽에서 그는 홀로 도움을 주는 동지들도 없이 외롭게 독립운동을 펼쳐나갔기에 활동 기록이 충분치 못하다. 광복 후 귀국해서도 이승만이 아니라 김구를 추앙하여 입지가 더욱 어려워졌다. 그러나 그가 끝까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695점의 자료들이 우여곡절을 거쳐서 부산박물관에 기증됨으로써 파란만장했던 그의 독립운동 일대기가 학술적으로 조명될 수 있었다. 부산에 가서 전시회를 보고 나오면서 잊혀질 뻔 했던 독립운동가 서영해 그리고 실물자료들을 통해서 그를 차분하게 평가하고 조명한 박물관 관계자들의 진지한 노고에 오랫동안 머리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