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옛날 난 타오르는 책을 읽었네
펼치는 순간 불이 붙어 읽어나가는 동안
재가 되어버리는 책을
행간을 따라 번져가는 불을 먹어치우는 글자들
내 눈길이 닿을 때마다 말들은 불길 속에서 곤두서고
갈기를 휘날리며 사라지곤 했네 검게 그을려
지워지는 문장 뒤로 다시 문장이 이어지고
다 읽고 나면 두 손엔
한 움큼의 재만 남을 뿐
놀라움으로 가득 찬 불놀이가 끝나고 나면
나는 불로 이글거리는 머리를 이고
세상 속으로 뛰어들곤 했네
그 옛날 내가 읽은 모든 것은 불이었고
그 불 속에서 난 꿈꾸었네 불과 함께 타오르다 불과 함께
몰락하는 장엄한 일생을
이제 그 불은 어디에도 없지
단단한 표정의 책들이 반질반질한 표지를 자랑하며
내게 차가운 말만 건넨다네
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 읽어도 내 곁엔
태울 수 없어 타오르지 않는 책만 차곡차곡 쌓여가네
식어버린 죽은 말들로 가득 찬 감옥에 갇혀
나 잃어버린 불을 꿈꾸네



책은 그냥 사물이 아니다. 책은 누군가의 일생이기도 하고, 의식을 지배하기도 하고, 새로운 삶으로 이끌어가는 지표이기도 한다. 세상을 건설한 영웅의 에너지는 책으로부터 부양받은 것이며, 성현의 위대한 가르침 또한 책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 누구나 한번쯤 '타오르는 책'에 정신을 데이게 되고, 온몸으로 책의 불길에 휘감겨 뜨거운 희망을 품어보기도 한다.
그러나 세상에 영원히 타오르는 건 없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건 식어버리고 '죽은 말들로 가득 찬 감옥에 갇혀' 쓸쓸히 견디게 된다. '타오르는 책'은 빛나던 젊은 시절과 용광로처럼 끓어오르던 열정의 시간을 동시에 내포하는 다의적 상징이다. 돌아보면 내게도 모든 것들이 한없이 타오르던 시절이 있었다. 밤새워 책을 태워 활자의 재를 뒤집어썼으나 정신은 피곤한 줄 모르고 상쾌했다. 그러나 지금은 반질반질한 책들이 내게 멀뚱하니 애정 없는 눈길만 던져주는데, 그런 풍경이 그다지 낯설지는 않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젊음의 화구를 오래전 통과했고, 내게 타오르던 책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식었으므로.
그러나 나는 죽기 전 단 한번만이라도, 타오르는 책에 정신이 데여 그날처럼 찬란한 활자의 잿더미 속에서 아침을 맞이할 수 있길 기도해 본다. 그것은 지루한 세상을 끝끝내 견디게 하는 뜨거운 정신이니까.

/권영준 시인·인천부개고 국어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