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어시장 어선에서 막 쏟아낸 고기들이 파닥파닥 바닥을 치고 있다 /육탁(肉鐸) 같다 /더 이상 칠 것 없어도 결코 치고 싶지 않은 생의 바닥 /더 이상 칠 것 없어도 결코 치고 싶지 않은 생의 바닥
생애에서 제일 센 힘은 바닥을 칠 때 나온다
나도 한때 바닥을 친 뒤 바닥보다 더 깊고 어둔 바닥을 만난 적이 있다 /육탁을 치는 힘으로 살지 못했다는 것을 바닥 치면서 알았다/도다리 광어 우럭들도 바다가 다 제 세상이었던 때 있었을 것이다/내가 무덤 속 같은 검은 비닐봉지의 입을 열자
고기 눈 속으로 어판장 알전구 빛이 심해처럼 캄캄하게 스며들었다/아직도 바다 냄새 싱싱한, /공포 앞에서도 아니 죽어서도 닫을 수 없는 작고 둥근 창문 /늘 열려 있어서 눈물 고일 시간도 없었으리라 /고이지 못한 그 시간들이 염분을 풀어 바닷물을 저토록 짜게 만들었으리라 /누군가를 오래 기다린 사람의 집 창문도 저렇게 늘 열려서 불빛을 흘릴 것이다
지하도에서 역 대합실에서 칠 바닥도 없이 하얗게 소금에 절이는 악몽을 꾸다 잠깬 /그의 작고 둥근 창문도 소금보다 눈부신 그 불빛 그리워할 것이다 /집에 도착하면 캄캄한 방문을 열고 / 나보다 손에 들린 검은 비닐봉지부터 마중할 새끼들 같은, 새끼들 눈빛 같은


굳이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 내 던져진 존재들이다. 실존의 상황에서 삶의 본질이 어쩌고저쩌고 운운하는 것은 어쩌면 사치일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더 이상 칠 것 없어도 결코 치고 싶지 않은 생의 바닥"에 맞닥뜨려진 존재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새벽 어시장 어선에서 막 쏟아진 고기들이 '바다'가 아니라 '바닥'을 파닥파닥 치고 있다. 이 모습에서 시인이 새롭게 만들어 내고 있는 '육탁(肉鐸)'이라는 단어. 육탁(肉鐸)은 사전에도 없는 말이다. '목탁(木鐸)'과 비교하면 그 의미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현실의 바닥을 온몸으로 치면서 얻게 되는 깨달음이랄까. 이 시에서 화자는 온몸으로 바닥을 치는 생선만큼이나 고통스럽고 절박한 삶을 사는 아버지이다. 아버지라는 존재보다는 그 아버지가 가지고 올 일용할 양식을 먼저 기다리는 "새끼들 눈빛 같은" 현실은 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가 겪어야 할 삶의 비극성을 잘 보여준다. "생애에서 제일 센 힘은 바닥을 칠 때 나온다"는 교훈 같은 말보다 "한때 바닥을 친 뒤 바닥보다 더 깊고 어둔 바닥을 만난 적이 있다"는 고백이 더 현실적이고 공감이 가는 이유이다. 그러나 팍팍하고 고달픈 현실이지만 "공포 앞에서도 아니 죽어서도 (그 눈을) 닫을 수 없는" 이유는 "누군가를 오래 기다린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며, 그 눈이 흘리는 것은 '눈물'이 아니라 '불빛'이 되리라는 믿음 때문이기도 하다. 그 불빛은 고통 속에서 꾹꾹 눌러 담았을 침묵들의 깊이와 숭고함이 배어 있다. 이 허무의 바닥에서 우리들의 삶은, 그래서 가치 있고 아름답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강동우 가톨릭관동대 교수·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