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재경 논설위원

꼼짝 않고 한자리에 머물러 어둠을 밝히는 등대. 한줄기 빛으로 길라잡이 역할을 하는 등대는 목적지가 아니다. 앞길을 비추어 최종 목적지에 무사히 도달할 수 있게 도와주는 안내자일 뿐이다. 등대의 한줄기 빛은 낭만이 서리는 고요한 밤바다보다는 칠흑같은 어둠과 세찬 폭풍우가 몰아치는 위기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기록에 남아있는 최초의 등대는 기원전 3세기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섬에 세워진 등대라고 하니 등대는 기원 전부터 인류 문명과 궤를 같이 해온 몇 안 되는 문물이라 할 수 있다. 등대는 의지할 곳 없는 바다 사람들의 구원의 불빛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전쟁에서 한순간에 전세를 뒤엎어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좌우하기도 했다. ▶그리스 신화에 유명한 항해사로 등장하는 에우보이아의 왕 나우플리우스는 트로이전쟁에 참전했던 아들 팔라메데스가 오디세우스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죽자 거짓 등대로 그리스 함대를 침몰시켜 복수를 했다. 나우플리오스는 에우보이아의 남쪽 타파레우스 곶 부근의 암초에 큰 불을 피워 등대처럼 보이게 해 귀항하는 그리스 함대를 유인, 암초에 부딪혀 침몰하게 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전국 바닷가에는 1307기의 등대가 불을 밝히고 있다. 이 중에는 아픈 전사(戰史)가 깃든 등대도 많다. 그 중 하나가 인천 앞바다의 팔미도 등대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등대로 1903년 6월1일 불을 밝힌 팔미도 등대는 일제가 러일전쟁에 대비해 인천항 길목에 세운 항로 표지이다. 이 등대는 한국전쟁을 승리로 이끈 인천상륙작전의 시발점이 됐다. 당시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특명을 받은 켈로(KLO)부대가 팔미도 등대를 점령하고 불을 밝히면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천에서 북서쪽으로 130㎞ 떨어진 연평도 등대가 최근 불을 밝혔다. 지난 1974년 남북 대치 속에서 북한군에 이용될 수 있다며 가동을 중단한지 45년 만이다. 불꺼진 연평도 등대는 냉전시대 남북 분단의 상징과도 같았다. 연평도 등대는 이번에 어민들의 조업을 돕기 위해 불을 켰지만 북측을 향한 등대 창에는 가림막을 설치해 북한 땅에서는 불빛을 볼 수 없게 하고 군사분계선 남쪽의 연평어장에서만 보이도록 했다. 남북분단의 현실이다. 남북이 하나가 되기 위해 넘어야 될 장애물이 산적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어느 한쪽의 일방적 구애만으로 하나가 될 수는 없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고 한다.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양쪽 모두의 의지와 숙성된 여건이 필요하다. 눈앞의 작은 성과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길게 멀리 보고 한발 한발 나가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