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문화읽기] 인천이 낳은 한국 교육계의 '거인' 화도 조광운
[인천문화읽기] 인천이 낳은 한국 교육계의 '거인' 화도 조광운
  • 이주영
  • 승인 2019.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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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시대, 굳은 신념으로 청년의 미래를 열다
▲ 고 조광운 박사가 세운 조선무선중학교 제3기 졸업식 기념사진. /사진제공=광운학원

 

▲ 1972년 고 조광운 박사의 국민훈장 동백장 수훈 기념사진. /사진제공=광운학원

 

▲ 올해 열린 조광운 박사 탄생 120주년 기념 전기물 <항상 그대와 함께 걷는길-광운학원 설립자 화도 조광운의 생애와 도전> 출판기념회 모습. /사진제공=광운학원

 

▲ 광운대학교 내의 화도관 전경. /사진제공=광운학원

 

▲ 조광운 박사 탄생 120주년 기념 <항상 그대와 함께 걷는길-광운학원 설립자 화도 조광운의 생애와 도전> 표지 및 목차. /사진제공=광운학원

 

 

1899년 화수동서 태어나 인천서 자라
일본서 신문물 접하고 육영사업 앞장

탄생 120주년 맞아 전기 출판물 출간
"고향에 깊은 애정…추모 사업 시작을"



화도(花島) 조광운 박사(1899~1980년), 거창한 수식어가 필요치 않다. 그 자체가 '거인'이요 '의인'이자 시대를 밝힌 '등불'이다. 인천 동구 신화수리(현 화수동)에서 태어나 쌍우물터에서 학문을 익히고 나라의 설움도 체득했다. 상업의 중요성을 일찍이 깨우쳤고, 재화를 통해 육영사업으로 민족의 정기를 세우려 노력한 화도. 인천은 최근까지 그의 인물됨을 몰랐다. 그러니 신경도 쓰지 못했다. 연초 화도 선생이 인천 인물이라는 귀한 소식이 알려졌고, 그의 탄생 120주년을 맞아 전기가 출간돼 그의 삶을 재조명할 기회를 맞았다. 인천은 화도를 잊지 않고 가슴 깊이 품어야 한다. 그래야 제2의 화도가 인천에서 나올 것이요, 그의 정신을 본받아야 세계 속의 인천으로 뻗어 나갈 수 있다.

서울 노원구에 자리한 우리나라 대표 사학 '광운대학교'. 그 학교가 새삼 친근해지는 것은 인천과의 '연' 때문이다. 광운학원의 설립자 화도 조광운 박사. 인천서 나고 자라며 망국의 한을 뼈저리게 느껴 상업의 중요성과 이를 통한 돈의 가치를 육영사업으로 승화시켰다. 인천인 조광운. 그가 광운대에 혼을 불어넣었고, 광운대에는 인천을 품은 화도관이 자리한다. 화도 조광운 박사의 삶을 어렴풋이 느껴본다.

▲조광운, 뜻을 품다
조광운은 1899년(광무 3년) 인천부 다소면 고잔리에서 아버지 조운식과 어머니 연일 정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호적원부에는 인천부 신화수리(新花水里, 현재의 인천시 동구 화수동) 123번지로 기록돼 있다.

조광운보다 1년 앞서 강화도에서 태어난 죽산 조봉암과는 창녕 조씨의 같은 항렬이다. 이 둘은 조국 광복과 우여곡절의 해방 정국 속에 얽히고 설킨 인연을 놓고 아직까지 실체와 소문이 혼돈돼 있다. 조광운이 태어난 쌍우물 마을은 구한말 격랑의 한복판에 서 있던 곳이다. 인근 응봉산과 용동고개, 율목언덕, 화도고개, 송림산 등을 뛰놀며 조광운은 풍전등화의 조국 운명을 목도했다. 그는 1910년까지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 인천보통학교에서 공부했지만 일본 군국주의 교육에 염증을 느끼며 4학년 졸업을 몇 개월 앞두고 교문을 박차고 나왔다. 조광운은 일본인이 운영하는 잡화점의 점원, 법률사무소 보조원으로 일하다 인천고 전신인 인천공립상업학교 병설 간이상업학교에 입학해 상업, 경제를 공부했다. 인천서 면직포 사업 등을 하던 그에게 1919년 3·1만세운동은 인생의 전환점이 됐고, 인천을 떠나 1200리길 신의주를 거쳐 다시 1400리길 중국 장춘을 찾았다. 그곳에서 사촌매부의 충고를 받아들여 일본으로 가 신문물을 접하고 라디오 시대가 올 것을 예상해 기초이론인 무선통신 기술을 습득했다. 그는 1923년 3월 서울 남대문 인근의 봉래동에 '광운상회'를, 1934년 5월 광운대의 뿌리인 '조선무선강습소'를 열었다.

"어찌 해방을 꿈이나 꾸어볼 수 있었던가. 그런데 그 아득했던 해방이 마치 손바닥 안에 들어 있는 것처럼 눈앞에 찾아온 것이다."(조광운 회고록) 그는 해방 직후 조선무선초급중학교로 편제를 바꿨다.

그는 "과학기술 교육의 대상은 인간이다. (…) 아무리 진선진미(眞善眞美)한 과학기술을 지니고 있다 해도 거기에는 반드시 인간다운 품격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는 의식을 가슴에 품으며 살았다.

조광운은 육영사업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72년 국민훈장 동백장, 1974년 한양대학교 명예 법학박사학위 등을 받았다. 현재 광운학원(이사장 조선영) 산하에는 광운대학교, 광운전자공업고등학교, 광운중학교, 남대문중학교, 광운초등학교, 광운유치원 등 총 6개의 교육기관이 있다. 올해 광운대는 설립 85주년이 됐다.

▲인천, 조광운을 품자
"나의 지나온 생애가 결코 순풍에 돛을 단 순탄한 항해가 아니고 갖은 풍랑과 파도 속에서 오직 신념과 투지만을 가지고 싸워 이겨온 생애이기에 뒤따라오고 있는 후배들, 특히 청년들의 앞날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기대 속에서 이 글을 쓴다."

미완으로 남은 조광운의 회고집 한 단락이다. '후대를 위한 선대의 자세, 후대의 희망에 찬 설계를 위해 선대는 후대를 올바로 이끌기 위해 끊임없이 반성해야 한다'는 게 조광운의 신념이다.

조광운은 자신의 아호(雅號)를 화도(花島)라고 하고 자신이 설립한 대학의 본관을 화도관(花島館)이라고 할 정도로 고향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졌다. 태어나 약 20년을 살았던 곳, 어머니 품과 같은 그곳을 조광운은 평생 가슴에 품었다.

화도 조광운 박사를 기념하기 위해 지난 1985년 세워진 화도기념사업회의 김기영 이사장(전 광운대 총장)은 "자신의 아호를 화도(花島)라고 할 정도로 평생 고향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살았던 조광운과, 그 누구도 유서 깊은 사학 설립자를 기억하거나 기록으로 남기지 않은 인천과의 짝사랑은 이제 끝나야 한다"라며 "광운학원의 출범과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설립자의 국제적 비전을 이어받아, 우리 광운의 모든 학교들이 국제 협력 활동을 활성화하는 기회로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김 이사장의 조광운을 품지 못한 '인천'에 대한 아쉬움에 낯이 화끈거린다.

그래서 제안한다. 이제 인천이 화도 조광운 박사를 기억해야 한다. 추모의 방식과 행위의 크고 적음이 중요치 않다. 그가 인천서 태어났고, 인천서 육영의 뜻을 키우며 평생을 조국의 안녕과 육영사업에 매진했다는 사실만 기억하면 된다. 김기영 이사장은 "설립자의 출생지인 인천 등 지역사회와의 연계 사업을 확충하는 일도 시도해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는 소망을 나타냈다.

광운학원은 화도 조광운 박사 탄생 120주년을 기념해 그의 전기 출판물 <항상 그대와 함께 걷는길-광운학원 설립자 화도 조광운의 생애와 도전>(역사비평사)을 출간했고 지난 15일 광운대 동해문화예술관 소극장에서 출판기념회를 개최했다.

불꽃처럼 살다간 조광운의 삶이 고스란히 담긴 그의 전기 출판물을 통해 인천 곳곳을 누비고 다녔을 조광운이 그려지고, 그 곳에서 열정을 불태우며 꿈을 키웠을 청년 조광운의 숨결을 느껴본다.

/이주영 기자 leejy96@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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