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문종 경기도지속가능발전협의회 운영위원장


추첨으로 국회의원이나 시·도의원을 뽑을 수는 없을까? 이리 고치고 저리 고쳐도 불만투성이니 추첨이라도 해보자는 심보로 하는 제안은 아니다. 작은 변화도 거부하고 기득권을 지키려는 여의도의 행태가 보이지만, 그렇다고 아무 생각 없이 미래를 운에 맡겨보자는 것도 아니다. 추첨하면 로또를 떠올리는 다수 시민의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오랜 민주주의 역사 속에서 유지되어 온 선거민주주의와 비교해 추첨민주주의의 역할을 진지하게 검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의 원형으로 알려진 도시국가 아테네에서 대부분의 선출직 선발방식은 선거가 아닌 추첨이었다. 아테네 민주주의의 상징은 시민이 직접 참여해 구성하는 민회에 있었다. 민회와 함께 중요한 역할을 한 평의회, 시민법정, 행정관 3개의 기구도 존립했다. 평의회와 시민법정의 구성원 전원뿐만이 아니라 700여명의 행정관 중에서 군사, 재정, 감사 등의 전문 기술자를 필요로 하는 100명 정도만 선거를 통해 뽑았고, 나머지 600여명은 추첨으로 선발했다. 이러한 아테네 민주주의 제도는 300여년을 지속하며 도시국가로서의 영화를 유지했다.

추첨민주주의는 아테네뿐만이 아니라 근대 선거제가 자리 잡기 전까지 아주 오랫동안 서구 정치체제에서 중요한 기능을 해 왔다. 프랑스대혁명 전후 프랑스의 정치체제를 정립해가는 과정과 미국 연방헌법을 둘러싼 격론 과정에서 추첨민주주의에 대한 토론은 활발하게 전개됐다. 다만 대리인을 선출하는 방식으로 선거제가 자리 잡게 되면서 추첨제는 소리 없이 사라졌다.
그렇다면 선거제는 얼마나 민주적일까. 프랑스 정치학자 버나드 마넹은 고대 아테네부터 중세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추첨제와 선거제를 집요하게 탐구하면서 선거제는 탁월한 대표자를 뽑는 귀족주의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만 정기적인 선거를 통해 시민이 평결을 내리기 때문에 민주주의적 성격도 혼재되어 있음을 강조하면서 숙의를 통한 민주주의의 발전을 제안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선거를 살펴보면 선거과정에 유권자가 여러 후보자 중에서 한 명을 선택하는 기준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재능이나 재산, 언변 등에서 자신보다는 뛰어나다는 판단 혹은 여러 후보자 중에서 가장 탁월하다는 평가를 내린 후보자를 선택하게 된다. 나와 비슷한 대표자가 아닌 나보다는 탁월한 대표자를 선택한다는 탁월성의 원칙이 선거에서 작동하게 된다. 다만 선거의 민주적인 요소는 모든 시민이 동등하고 자유롭게 그 판단에 참여해 결정을 내린다는 것이다. 따라서 선거는 귀족적이며 민주적일 수 있다.
그러므로 세계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선거제도를 운용하고 있지만 선출된 대표자는 자신을 뽑아 준 유권자와 늘 멀어져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운 나라는 없다. 이러하기에 우리는 마넹의 결론이 선거 때마다 혹은 선거제 개편 논의과정에서 늘 언급되는 이유 또한 이해할 수 있다.

다시 고대 아테네로 돌아가 추첨민주주의를 생각해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추첨제의 민주적 성격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추첨을 통해 집정관을 지명하는 것은 민주적인 것이고 선거에 의한 것은 과두적이라는 것이다. 재산 자격에 기초하지 않은 것이 민주적인 것이고, 그에 대한 제한이 있는 것은 과두적인 것이다." 앞서 마넹의 결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반복임을 알게 된다.

어찌됐든 추첨제는 원하는 시민이라면 모두가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직접 민주주의적 요소를 갖고 있으면서도 추첨에 의해 선출된 특정한 사람이 역할을 수행해야 하므로 간접 민주주의적 요소를 함께 갖게 된다. 다만 추첨에 의해 선출된 사람은 탁월한 능력자보다는 보통 시민의 정서와 눈높이를 가진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유권자를 대표하여 유권자의 의사와는 다르게 결정하기보다는 유권자를 대리해 유권자와 비슷한 결정을 할 것이다. 또한 나 자신도 언젠가는 선출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대리인이 선택한 결과에 대한 신뢰는 확고해진다.

선거가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유일한 선출방식은 아니었다. 민주주의 역사에서 추첨은 선거와 함께, 아니 선거보다 더 광범위하게 사용된 민주적 선출방식이었다. 고장난 대의제 민주주의를 선거와 함께 추첨민주주의를 통해 보완하면 어떨까. 다만 새로운 방식의 도입에 대한 우려를 작은 단위의 실천과 성과로 넘기고, 해외 여러 사례를 참고해 주민참여예산 위원 선정, 주민자치회 위원 선정 경험을 발전시켰으면 한다. 마을단위의 성공을 바탕으로 지방정부, 나아가 국가단위에서 다양한 방식의 추첨민주주의를 확대해 선거민주주의의 문제를 보완하길 제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