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수 논설실장

6학년 담임선생님의 '꿀밤'은 아직도 뇌리를 스친다. 스승의 날에 떠오르는 나의 선생님이다. 만해 한용운의 근대시를 열정적으로 해설하시던 고교 국어선생님, 회초리를 들며 마음 아파했을 안경 너머 선생님의 그런 눈빛을 다시 보고 싶다. 그뿐이랴 대학을 은퇴하고도 깨알같이 적은 논문 자료를 심야시간에 건네주시던 은사님의 노트는 소중한 자산으로 남아 있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깨닫는 스승들의 격려와 제자 사랑의 징표들이 하늘만큼 크게 느껴지는 날이다. 인간은 교육을 통해 무엇이 되어 간다. 하지만 오늘날 체벌이 다양하고 심각한 사회문제로 거론되고 있는 교육의 현장에서 '선생님'의 의미는 쇠퇴했다. 많은 학부모들은 자녀들이 교실에서 특별한 대접을 받기를 원한다. 높은 지성을 지닌 유능한 교사에 집착하는 시대이다.

'가르침'은 열등한 수준을 우월한 위치로 끌어올리는 인고의 활동이다. 특별히 부모는 물론 예수, 석가, 공자 등이 역사 속에 우뚝 선 위대한 교사들로 추앙된다. 지식을 전달하고, 삶을 가르치는 일이 교사의 전제조건으로 중요하다고 하지만 사랑이 없이는 지식 전달자에 불과하다는 것이 에두아르트 슈프랑거의 주장이다. 이성호 연세대 명예교수는 교사의 역할 32가지 중 '정신적 지주', '기대어 울 수 있는 어깨', '동정어린 친구' 등을 포함시켜 가르치는 사람으로 지칭되는 '교사'가 과연 누구인가에 대한 해답을 구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교권붕괴 상황에서 체벌이 교육적 수단으로 작동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교실 안에는 학업성취가 부진한 아동들도 있고, 수업 분위기를 어지럽히는 무질서한 아이들도 있기 마련이다. 학생 신분에서 벗어나 유해업소를 출입하는 비행 청소년이 있고, 교칙을 위반하는 학생들도 있다. 적성과는 거리가 멀고 흥미 없는 입시위주의 수업내용과 너무 엄격한 학교 규칙, 잡무에 시달리는 교사 등 학교 구성원들의 입장이 상충한다. 이른바 체벌이 폭력으로 비화하는 경계의 상황들이다.

더욱이 결손가정이 증가하는 가족구조에서 가정교육의 파행을 겪는 아동의 정서적 욕구까지 수용하기란 교사와 학교 역할이 과중해 보인다. 하지만 꽃 같은 아이들이 훈육을 핑계로 체벌에 내몰리지 않아야 한다. 또 교사의 교육적 사명감과 윤리의식에서 발현되는 체벌이 비난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귀한 자식 매 한 대 더 때린다'는 우리 속담은 유효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