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공자의 손짓, 반세기를 이끌다
▲ 기타의 매력은 뭘까. 천상의 소리를 찾으러 악기가 만들어졌다면, 기타가 가장 가깝지 않을까. 리여석 기타오케스트라를 48년째 이끌고 있는 리여석 단장이 올해 80세를 맞았다. 비록 육체적 나이로 몸은 늙었어도, 정신은 더욱 또렷해진다. 리 단장은 이를 "노련해졌다"고 표현한다. 리여석 기타오케스트라가 지난 4월28일 52번째 정기연주회를 가졌다. /사진제공=리여석 단장


홀로 책으로 악기 공부하다
교직 물러나 순수합주단 결성
지휘자인 친구 가르침 덕에
우려에도 30여명 단원 통솔
연주용 편곡만 600곡 넘어




인천의 리여석, 그의 존재만으로 전국 기타계는 인천을 우러른다. 그만큼 인천의 귀한 보배요, 인천의 자랑이다. 기타는 리여석을 만나 찬란하게 빛을 내며 오늘에 이르렀다. '리여석 기타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있는 리여석 단장, 그가 올해 80세를 맞았다.

리여석은 우리나라 기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고, 리여석 기타오케스트라는 전국을 넘어 세계에 이름을 높였다. 60년 세월을 기타와 함께 한 리여석. 그에게 기타란 무얼까. 그는 과하지도 무리하지도 않는 기타 소리가 인간과 소통하는 최고의 악기라고 자부한다.


지난 4월28일 인천 남동구 인천문화예술회관 소극장에서 '2019 리여석 기타오케스트라 52회 정기연주회'가 개최됐다. '아름다운 사람들아!'를 타이틀로 한 이날 연주회는 객석을 꽉 채웠다. 지휘자 단상에 오른 백발의 리여석을 둘러싼 기타오케스트라가 1시간30분간 내뿜은 열정에 관객 모두는 기타의 매력 속에 빠졌다. 지휘 전 "이 곡은 모두 4악장으로 구성돼 연주가 이어지니 중간에 박수는 안치셔도 된다"며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계획된 연주곡이 모두 끝나고 무대 위로 꽃을 든 아이가 앞장서고 그 뒤로 케이크가 전달됐다. 관객 모두 "생신 축하합니다"를 합창하며 노(老) 지휘자의 80세 연주회를 축하했다. "80살 노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기라성 같은 전국의 연주가가 함께 했고, 일본에서도 와주셨다"며 "2년 후 우리 오케스트라가 창단 50년이다"고 말하는 리여석 단장, 그의 기타 여정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기타, 운명과 마주서다

한국전쟁이 막 끝난 나라 안은 온통 가난했다. 기타마저 생소한 상황, 부천 소사에 살던 중학생 리여석(본명 이은철)은 선배 집에서 처음 기타와 마주했다. 단순하면서 명료한 기타 소리에 빠졌지만, 그의 곁을 떠난 선배와 함께 기타도 사라졌다. 그렇게 기타와 멀어진 것도 잠시, 대학 때 기타를 다시 접했다. 그의 군용목침대와 맞바꾼 기타, 홀로 책으로 독파한 기타는 리여석 기타 인생의 출발점이다.

대학 때 국문학을 전공했고, 부평여중 국어교사로 부임했다. 1960년대 후반은 기타와 연관된 사회적 통념이 녹록지 않을 때다. 그럼에도 당시 학교장이던 이준경 선생님이 기타합주단 구성을 제안했다. 전문적으로 기타를 연주한 것도 아니요, 단지 취미로 했던 기타가 어느 순간 리여석 단장 인생에 깊숙이 들어왔다.

국어교사 리여석이 이끄는 부평여중 기타합주단은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1970년대 후반에는 여러 차례 TV에도 출연해 기타 열풍을 이끌었다. 음악이 아닌 소리로 합주단을 이끌던 리여석 단장, 주변의 박수에 취해있던 그 때 그는 벼락같은 세 번의 불호령을 맞았다.

첫 번째는 이용주 선생 등 한국기타협회 원로들의 '기초를 다시 배우라'는 충고요, 두 번째는 작곡가 금수현 선생의 '음악이론을 공부하라'는 조언이었다. 마지막은 그의 오랜 벗이요, 음악의 길라잡이가 되어준 인천시립교향악단 초대 지휘자인 김중석 교수다. 김 교수는 그에게 직접 지휘를 가르쳤다.

리여석 단장은 "몹시 추운 겨울날 아침 누가 현관문을 쾅쾅 두드려 문을 열었더니 중석이가 악보를 한 움큼 들고 서 있었다"며 "겨울방학 내내 중석이로부터 지휘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지휘를 깨우쳤을 때 과거에 지휘했던 영상을 보니 창피해서 그 기록들을 모두 없애버리려 했다"며 "이조차도 역사라는 생각에 폐기하지는 않았지만, 지금의 나는 중석이의 가르침 덕이 크다"고 덧붙였다.

▲기타, 현실에 고함

찬란한 봄볕과 더불어 창문 너머 펼쳐지는 인천항이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중구 자유공원 인근 '파랑돌' 커피숍, 그곳은 리여석 단장의 아지트다. 연주회를 끝내고 열흘 만에 리여석 단장을 이곳에서 만났다.

그는 누차 "난 기타 비전공자"라는 말을 뱉었다. 왜 그럴까. 기타 비전공자라는 말이 달갑지 않을텐데 스스로 언급하는 이유는 뭘까.

리여석 단장은 1971년 국내 최초 기타오케스트라를 꾸렸다. 순수 기타만의 합주단이 가능할까, 그리고 기타로만 온갖 소리를 끄집어낼 수 있을까. 그런 우려에도 리여석 기타오케스트라는 48년을 이겨냈고, 그는 600곡이 넘는 곡을 기타오케스트라용으로 편곡했다. 베토벤 서곡의 복잡한 소리가 기타 합주로 재탄생했고, 4악장 모차르트 세레나데가 관객 앞에 기타 합주로 연주될 때는 짜릿해진다.

그는 "우린 엄격한 아마추어이다. 프로와 아마의 중간지대쯤 위치했다. 치열하게 연습하고, 기타를 치기 위해 직업을 갖는다는 단원들의 마음자세가 48년의 기타오케스트라를 가능케 했다"고 밝혔다. 그 자신이 교사직을 내려놓고 온종일 기타와 씨름하며 자신을 다듬고, 기타오케스트라를 이끌었다. 그래서 "난 기타 비전공자"라는 그의 말 속에 치열했던 기타에 대한 자신감이 담겨 있는 것이다.

50명 이상이길 바랬던 리여석 기타오케스트라는 아직 30여명에 그쳐있다. 언제쯤 리여석 기타오케스트라가 50명 완성본을 맞이할까. 리여석 단장이 앞으로도 수십년 지휘봉을 놓지 않길 바라는 이유는 명료하다. 리여석 같은 인물이 배출될 것이란 기대가 힘든 만큼 리여석 기타오케스트라가 오래도록 유지되길 바라기 때문이다.

▲리여석 단장은

리여석 단장은 1940년 5월2일 부천 소사에서 태어났다. 1958년 인천고를 나와 1964년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67년부터 1983년까지 부평여중과 부평동중, 부평고, 제물포여중에서 교사생활을 했다. 그는 한국기타협회 회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고문으로 활동 중이다. 국제 기타오케스트라협회 (IGO) 한국 본부장, 한국기타오케스트라(KGO) 단장 겸 상임 지휘자, 일본 오사카 오노 기타오케스트라 수석 객원지휘자, 중국 요녕성 기타학회 고문, 심양 음대 기타과 기타 앙상블 과정 외래 강사 (교수대우) 등을 지냈다. 그가 이끌고 있는 리여석 기타오케스트라는 1971년 창단한 우리나라 최초 기타오케스트라로 200회 이상의 연주 기록을 갖고 있다. 세키야 세이지 전 일본 큐슈 음악가 협회장은 "한국에 살면서 이들의 연주를 한 번이라도 듣지 못한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 될 것이다"라고 평했다.

/이주영 기자 leejy96@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