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신문이 그의 업적에 환호했고 죽음엔 분노했다
임정·백범 중심 첫 남북협상~암살 기사 엮어
▲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엮음멘토프레스731쪽, 3만원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과 백범 서거 70주년을 기념하는 뜻 깊은 해를 맞이하여 출간한 이 책은 해방전후 대한민국 전체 상황을 다루지는 않는다. 27년 동안의 파란만장했던 항일투쟁을 마친 임시정부와 그 수장인 백범 김구 선생의 발자취를 위주로, 당시의 언론에 기록된 내용을 중심으로 담고 있다.

광복을 맞이하고 3개월 뒤인 1945년 11월23일, 임시정부 요인들이 처음으로 조국의 밤을 맞이한 곳이 경교장(당시 죽첨장)이었다. 경교장은 그로부터 백범 김구 선생이 암살당하기까지 3년 7개월, 정확히 1310일간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였으며 남북통일운동의 본산이었고 백범 암살의 현장이었다.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대한민국 임시정부 마지막 청사'에서는 1945년 8월15일부터 1946년 1월까지를 주로 다룬다. 일왕이 항복을 선언하고 많은 수의 독립지사들이 서대문 형무소에서 풀려났다. 하지만 나라는 미군정하에 통치됐다. 중국 상해에 있던 임시정부는 광복군과 함께 국내 진공작전을 시도하고 있었으나 갑작스러운 해방에 제대로 그 뜻을 펼쳐보지 못하고 귀국한다. 미 군정청 하지는 성명과 포고령을 발표했으며, 임시정부는 정부차원의 성명을 발표한다.

임시정부는 14개조에 달하는 당면정책을 공식 선언했다. 이 가운데 임시정부는 정부 차원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개인자격으로 환국한다. 숨가쁘게 돌아가던 정국은 임시정부요인의 환영대회를 기점으로 통합의 정점으로 치닫는다. 하지만 연말을 앞두고 벌어진 '모스크바 3상회의'의 신탁통치 결정으로 온 나라는 양분된다. 친탁과 반탁으로 정국이 요동치고 상점과 극장이 철시하고 총파업으로 신년을 맞이한다.

'제2부, 남북협상의 산실'에서는 1948년 1월부터 6월까지 통일된 조국과 완전한 자주독립을 이룩하고자 했던 현장을 생생히 포착한다. 1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움직임이 있고 이를 절대 반대하는 김구 주석의 성명으로 시작한다. 통일조국에 대한 백범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러 세력과 노선의 충돌은 불가피해 갈등은 증폭되기 시작한다.

김구 주석은 지금 보아도 애절한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라는 성명을 발표한다. 통일과 완전한 독립국가를 꿈꿨던 임시정부는 북쪽에 있던 독립운동가 백연 김두봉에게 서로 만나자는 전갈을 비밀리에 전한다. 김구 주석과 김규식 부주석은 총선참여를 거부하고 마침내 첫 번째의 역사적인 남북협상 회담을 위해 38선을 넘어 북행한다. 남과 북이 갈라지면 필시 전쟁이 오고야 말 거라는 생각에 남북화합에 온 몸을 내던진 노 혁명가 김구의 뜻은 비록 실현되지 못했지만 그를 동행 취재했던 여러 사람들의 생생한 취재기로 마무리한다.

'제3부, 백범 암살의 현장'에서는 1949년 6월 26일 백범 서거 당일부터 7월 국민장을 치루는 과정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피습이 이루어지고 그 즉시 온 나라는 비분강개하며 슬픔에 빠진다. 노 혁명가이자 정치인인 민족의 큰 별이었던 백범 김구선생을 추모하는 여러 사람들의 인터뷰는 지금 봐도 아쉬운 감정을 느끼게끔 생생하다.

망자를 위한 거국적인 움직임이 일어나고, 장례를 위한 준비와 장례식이 온 겨레의 슬픔 속에 거행된다. 당시 조문객이 10일간 124만명이라는 기사를 보더라도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그를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백범이 서거한 뒤 52년 만인 2001년 그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백범 암살의 배후가 미 공문서의 비밀해제를 통해 세상에 드러나며 대단원을 마무리한다.

/여승철 기자 yeopo99@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