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부 이호웅·김교흥, 국회로
김문수·故 노회찬도 시위 참여
1986년 5월3일 인천에서 전개된 5·3 민주항쟁은 1년 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서슬퍼런 군부독재에 맞서 직선제 개헌을 요구했던 5·3 민주항쟁은 이듬해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을 계기로 전 국민적인 항쟁으로 이어져 마침내 군부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해냈다. 5·3 민주항쟁을 이끌었던 주역들 역시 이후 정치권에서 활동하면서 우리 정치 발전을 견인해 왔다.

당시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인사련) 의장으로 현장을 총지휘했던 이호웅 전 국회의원은 8개월간의 도피생활 끝에 검거돼 투옥됐다. 5·3 민주항쟁을 계기로 정치권에 들어선 이 전 의원은 세 번의 선거에서 고배를 마신 후 16·17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을 지냈다.

이 전 의원은 "5·3 항쟁은 '대통령직선제 개헌 현판식'을 통해 표출되고 있던 국민적 민주역량이 인천으로 총결집된 역사적 사건"이라며 "5·3 항쟁을 뿌리로 87년 6월 항쟁이 싹이 텄고 2016년 촛불혁명으로 이어지게 됐다"고 말했다.

인천대 총학생회장으로 5·3민주항쟁을 이끌었던 김교흥 더불어민주당 서구갑지역위원장은 "5월2일 총학생회장으로 선출돼 하루 뒤에 항쟁에 참여하게 됐다"며 "당시 시민회관 앞에는 인천대·인하대 학생부터 노동자, 시민사회단체 등 수십만명이 모여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김 위원장도 5·3 민주항쟁을 계기로 정치권에 입문해 17대 총선에서 당선됐다. 이후 세 번의 총선에서 내리 낙선했지만, 인천시 정무부시장, 국회 사무총장 등을 역임했다.

서울지역노동운동연합 지도위원으로 5·3 민주항쟁에 참여했던 김문수 전 경기지사는 당시 직선제 개헌투쟁 주도 혐의 등으로 구속돼 2년6개월형을 선고받아 복역했다가 1988년 특별사면을 받았다. 1990년 민중당에 참여해 14대 총선에 출마했다 낙선한 후, 1994년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권유로 "혁명의 시대는 갔다"는 말을 남기고 민주자유당에 입당해 15·16·17대 국회의원과 경기도지사를 지냈다.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하던 고 노회찬 의원도 5·3 민주항쟁과 연을 맺고 있다. 노 전 의원은 김문수·심상정·이재오 등과 함께 서노련에서 활동하면서 항쟁에 한 축을 이뤘다. 노 전 의원은 이후 3번의 당선과 3번의 낙선을 거듭하는 동안 진보정당의 대중화에 기여해 왔으며, 이른바 '드루킹 사건'에 연루된 의혹을 받아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이상우·정회진 기자 jesuslee@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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