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봉 인천대 기초교육원 객원교수

며칠 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실시한 전통적 남성 역할에 대한 연령별 생각 차이에 대한 조사결과를 A신문이 보도했다. 남성의 육아휴직이 늘어나고, 살림하는 남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달라지면서 '취업 대신 장가간다'는 뜻의 '취가'가 유행한다고 전했다. 20년 전에도 능력 있는 아내가 운영하는 가게의 문만 열고 닫는 일을 하는 '셔터 맨'이 회자됐다. 또 유치원을 운영하는 아내의 유치원 등·하원 차량만을 운전하는 '봉고 맨'이니 하는 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때와는 상황이 사뭇 다르다.

이 신문 기사는 20대 남성들의 가치관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데 달갑지만은 않았다. 겉으로는 남녀의 역할 구분이 사라져 평등한 사회로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왜 남자만 희생해야 해!'라는 이기심이 있다. 부모세대보다 더 많은 교육을 받았지만 마음의 여유가 사라진 지 오래이다.
그도 그럴 것이 2010년 이후 청년실업 증가와 과도한 삶의 비용으로 연애와 결혼, 출산을 포기한 '삼포세대'가 출현하더니 곧바로 취업과 내 집 마련까지 포기한 '오포세대'가 나타났다. 그리고 인간관계나 미래에 대한 희망마저 포기한 '칠포세대'를 거쳐 모든 것을 포기한 'n포세대'까지 등장했다. 오죽하면 '이번 생은 망했어!'라는 '이생망'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졌겠는가. 이런 상황에 20대 남성들은 여성과 노인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정책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한다. 자신들만 희생당하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데도 당장의 손해에 민감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20대 여성에게도 똑같이 나타난다. 사회적 불평등이 존재하는 한 여성에게 더 많은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도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해서는 둔감하다.

마음의 여유가 없어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사라진 것은 맹자가 말하는 '항산(恒産)'이 없기 때문이다. '쌀독에서 인심 난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정부도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 정부가 만들어주는 일자리만 바라보며 '항심(恒心)' 따윈 없어도 된다고 생각할 것인가. 항심이란 함께 살아가기 위해 가져야 할 올바른 마음이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턴가 이런 마음을 잊고 살고 있다. 우리가 각박해진 것은 모두 경제 탓이니 남을 짓밟고서라도 나만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혼밥'과 '혼술'이 일상어가 되어버렸고, 나 혼자 사는 '1인 가구'가 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자본시장은 발 빠르게 이들을 위한 마케팅 전략을 내 놓고 있다. 새로운 트렌드에 민감한 젊은 세대는 예쁘게 포장된 외로움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며 나 혼자만의 삶을 꿈꾼다. 그러나 누구도 이것이 사회적 문제라고 지적하지는 않는다. 아니 이런 것을 지적하면 꼰대가 되어버린다.

연애와 결혼은 물론 모든 것을 포기한 n포세대는 이제 나만의 삶을 즐긴다고 한다. 빚을 내서라도 해외여행은 가야하고, 점심은 굶어도 디저트 카페에는 가야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SNS에 이런 것을 찍어 올리면서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며 위안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모든 것이 내가 만든 삶이 아니라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위안은 짧고 공허함은 오래간다. 그러니 SNS를 놓을 수가 없다.
맹자는 '항산이 없으면서도 항심을 가지고 있는 자는 오직 선비뿐이다'라고 했다. 선비란 원래 공부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더 나은 일자리를 갖기 위함이 아니라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올바른 마음을 갖고자 함이다. 그런데 우리의 공부는 오로지 취업에만 집중되어 있다. 다시 말해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한 공부만 하고 있으니 하면 할수록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공부가 이러한데 배우고 익히는 것이 어찌 기쁘겠는가.

<논어>의 첫 문장은 공부를 통한 자기 성찰이다. 공부가 기쁨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시도 때도 없이 익힌다는 '시습(時習)' 때문이다. 이것이 자기 성찰이며, 이것을 해야 나의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게다가 이러한 나의 삶을 알아주는 벗, 즉 동지가 있다면 이것보다 즐거운 일은 없을 것이다.
SNS에서 '좋아요'를 바라는 것도 모두 이런 즐거움 때문이 아니던가. 다만 차이가 있다면 행복의 기준을 누가 만들었냐는 것이다.

자기 성찰을 통해 나의 기준으로 만든 삶이 있고, 이것을 알아주는 벗이 있다면 설사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성내지 않을 수 있다고 공자는 말한다. 군자란 바로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이다. 모두가 군자가 되라고 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부모세대보다 더 많은 교육을 받았다면 세상을 바라보는 아니 행복의 기준은 내가 만들어야 되지 않을까. 남이 만들어 놓은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한탄하고, 부모세대보다 가난한 세대가 될 것이라 불안해하기보다는 나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치열한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