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영 인하대 항공우주공학과 교수

어느 조직이나 만들어질 때 목적이 있기 마련이다. 미국 항공우주국 나사의 홈페이지에는 그 기관의 비전을 '인류에 도움을 주기 위해 지식을 찾고 확장하는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나사에 해당하는 우리나라 기관인 항공우주연구원의 홈페이지에서 설립 목적을 찾아보면 '항공우주과학기술 영역의 새로운 탐구, 기술 선도, 개발 및 보급을 통하여 국민경제의 건전한 발전과 국민생활의 향상에 기여한다'고 되어 있다. 항공우주 분야에서 가장 큰 경제적 실익을 누리는 나라는 미국이고, 우리가 한참 뒤처져있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비전 선언문을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경제성을 강조하는 것은 우리나라다. 이런 것은 다른 첨단 과학기술 분야도 유사할 것 같다.

국가 차원의 인력양성과 기술 R&D 분야에 대한 투자는 후발국 발전의 필수 요소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중화학공업 및 전자산업에 집중 투자한 우리나라는 천연자원이 부족한 국가임에도 짧은 기간에 산업화에 성공해 비슷하게 출발했던 다른 개발도상국들의 부러움을 사는 모범사례가 됐다.

작년 말 기준으로 인구 5000만명이상이며 1인당 국민소득이 3만달러이상인 국가의 반열에 들었다. 우리보다 앞서 일본, 독일,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가 순서대로 이 수준에 도달했다. 하지만 이 모든 나라들이 성장세를 이어가지는 못하고 있다. 이들 중 1인당 국민소득 4만달러이상으로 안정적으로 성장한 나라는 독일과 미국뿐이다. 즉 지금까지의 가파른 성장세가 자연스럽게 이어지지는 않는다.

우리의 산업화 과정을 돌아보면 정부의 확고한 의지와 일관된 정책이 큰 역할을 했다. 선진국의 발전 방향을 보고 그것을 잘 따라가기만 해도 웬만큼 성공은 거둘 수 있었다. 소위 패스트 팔로워 전략이다.
소수의 선발된 관료들은 성실하게 그 작업을 수행했다. 5개년 계획을 세우고 일사불란하게 집행했다. 잠재적 사회적 부작용이 커짐에도 불구하고 외적 성장을 위한 효율의 극대화가 추진되었고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그 시대가 절벽과 같이 끝나버렸다. 30~50클럽에 진입하기 위해 우리가 사용했던 방식의 유효기간이 다한 것이다. 우리뿐 아니라 우리보다 앞서 선진국의 대열로 진입했던 나라들도 비슷하게 겪는 현상이다. 문제는 이걸 어떻게 극복하느냐이다.

정부 관계자들을 만나면 하나같이 미래 먹거리와 일자리 이야기를 한다. 모두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아무도 확실한 해결책을 모른다. 각종 위원회를 만들어 미래 먹거리를 만들어 내라고 주문한다. 조금이라도 좋아 보이는 아이디어가 눈에 띄면 높은 분들은 그걸 대형 국가사업으로 발전시킨다. 하지만 몇 년 뿐이다.

고위공직자들이 2년 이상 같은 자리에 있는 경우는 드물다. 사업을 만드는 사람과 마감하는 사람이 같을 수 없다. 그러다보니 용두사미가 되는 사업들이 허다하다. 공직자의 순환보직 제도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이를 포기할 때 나타나는 부작용은 더 클 수 있다.
핵심은 더 이상 미래 먹거리 사업 창출이 몇몇 사람이 주도해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해서 찾을 수 있는 것이라면 세상의 모든 나라들은 그 방향으로 이미 뛰어들었다. 어느 누구도 10년, 20년 앞의 유망 분야를 확정할 수 없다.
공직자들이 어떤 분야의 R&D에 집중해서 투자할 것인지를 정해서 밀어붙이고 성과를 내던 시기는 지났다. 지금 정부도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이렇게 움직이지 않는다. 각종 기획위원회를 통해 사업들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여전히 최종결과물에 대해서는 공직자들의 '감'이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또 다른 쪽에서는 극단적인 공정성 요구가 문제다. 역시 공정성을 추구하는 그 자체의 문제는 아니다. 공정성이 모든 것에 우선하면 그것으로부터 생길 수 있는 문제에 대한 조그만 가능성으로부터 자유롭고자 비효율성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소위 이해관계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모두 배제하다보면 핵심 원천기술의 가치를 비전문가 집단이 평가하는 일도 생긴다.

우리의 모든 국가연구개발 사업에는 경제성이 꼬리표처럼 따라붙는다. 당연히 정부 지원 사업으로 선정된 것들은 현실적 또는 잠재적 경제성이 크다고 평가를 받은 것들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럴지는 의문이다. 당장은 불안하더라도 기존의 방식을 돌아보고 과감하게 손질해야 한다.
전문가의 영역으로 돌려줄 것은 믿고 주어야 한다. 그 안에서 전문가들의 치열한 토론을 거쳐 합리적인 결론이 나오도록 만들어 줘야 한다. 한쪽으로 몰아가려는 시도는 더 이상 우리 경제 규모와 위치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과학에도 경제성, 기술에도 경제성, 정치에도 경제성을 외쳐 봐야 효과가 안 나온다. 미국 항공우주국과 우리 항공우주연구원의 비전 선언문을 다시 보자. 과학은 과학처럼, 기술은 기술처럼, 정치는 정치처럼 제대로 해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