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역사 원정대 3만리 발자취를 따라서 - 난징·충칭 에필로그]
▲ 난징 리지샹(利濟巷) 위안소 구지 진열관을 찾은 청소년 역사 원정대원들이 위안부 강제동원 피해자의 동상을 살펴보고 있다. /이상훈 기자 photohecho@incheonilbo.com

 

▲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지 진열관을 찾은 '청소년 역사 원정대' 참가 학생들이 전시관을 둘러보고 있다.

 

▲ 청소년 역사 원정대원들이 태극기를 펼쳐들고 기념촬영 하고 있다.

 

▲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지 진열관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박서우(왼쪽)씨·박종휘씨.

 

원정대, 난징서 위안부·대학살 아픔 현장 방문

임정 윤봉길 의사 홍커우 의거 후 상하이 떠나

김구 선생 진강 목원소학교서 '망국 설움' 강연

충칭 연화지·광복군 청사 찾아 … 당시 숨결 느껴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 3만리 발자취를 따라서 첫 발을 내딛기 5일차, 6000㎞의 장정에 마지막 충칭에 도착했다. 임정은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의거 후 상하이를 떠나 돌고 돌아 난징에 닻을 내렸고, 다시 중·일 전쟁 여파로 중국 남쪽을 돌다 충칭에 터를 잡았다. 5년의 시간 충칭 삶이 이어졌다. 13명의 청소년 역사 원정대는 여독이 풀리기도 전 짐을 쌌고 임정 요인과 가족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알고자 여정을 이어갔다.

난징에서 위안부 할머니의 고통에 눈물을 훔쳤고, 일제가 자행한 난징 대학살에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충칭에 도착해서는 가슴과 가슴에 태극기를 그리고 조국을 노래했다.

▲지구인, 난징을 잊지 말자

빗방울이 제법 굵다. 밝기만 할 것 같은 남국은 대낮인데도 잿빛이다. 도심 한 가운데를 걷고 있는데, 쇠붙이로 짜놓은 울타리 사이로 처절한 동상이 망막을 강타한다. 멍하니 동상을 바라보는데, 뒤꿈치부터 정수리까지 소름이 솟아온다.

고개를 떨군 한 여인은 부풀어 오른 배만을 어루만진다. 옆에 선 여인들 역시 맨발로 멍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주시한다. 4월9일 난징(南京)의 첫 방문지, '리지샹(利濟巷) 위안소 구지 진열관'이다. 난징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흔적을 찾기에 청소년 역사 원정대의 일정이 빠듯했다. 대신 우린 일제 때 '고통'의 피눈물을 흘리며 하루하루가 '고난'이었을 위안부 할머니들의 생과 사를 찾았다.

옛 위안소 자리에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고 자료를 진열한 이곳, 만삭의 슬픈 표정을 짓는 동상은 우리 박영심 할머니다. 박영심 할머니의 결정적 증언, 난징에서 일제에 의한 일그러진 삶이 사실로 입증되며 이 곳은 문을 열었다. 차마 말을 이을 수 없는 현장의 기록들. 그 속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박영심 할머니. 그리고 이 곳에 끌려온 세계의 여인들. 일제의 만행은 이 곳에서 그치지 않는다.

우린 난징에서 두 번째 방문지 남경대도살 기념관으로 향했다. 하늘은 더욱 시커멓다.

난징 도심은 1937년 일제의 난징 대학살을 기억하는 듯 먹구름에 싸였다. 당시 일본군 5만 명은 6주간 민간인 학살과 성폭력을 자행했다. 60만 주민은 6주 뒤 30만으로 줄었다. 기념관 내부 한 중간 유리판 아래로 당시 유해들이 처참하게 땅 속에 박혀 있다. 벽면에는 철판으로 된 책이 늘어서 있고, 그 속에 희생자 명단이 빼곡히 음각돼 있다. 옆면 가득 당시를 기억하던 생존자 사진이 조명을 배경으로 걸려 있다.

어둑한 사진은 생을 다한 사람이다.

항저우를 출발해 난징에 도착하기 앞서 진강을 찾았다. 이 곳 옛 목원소학교에서 김구는 '조선 망국의 참상'이란 주제로 강연을 했다. 골목길 끝에 자리한 목원소학교 터. 방문객이 이 곳을 찾기에 진강은 외지다.

그렇기에 우리 청소년 역사 원정대는 잊지 않으려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기념비를 묵묵히 읽으며 이국에서 망국의 설움을 겪은 김구를 되새긴다.

▲임정 마지막 보금자리, 그리고 해방
임정의 마지막 여정이 눈앞이다. 그 얼마나 고단한 시간이었을까. 난징에서의 대탈출. 목숨을 건 탈출 길은 중국 대륙을 떠도는 부평초였다. <제시의 일기>는 '아기 제시의 탄생'이 쓰인 1938년 7월4일 중국 후난성 장사에서 시작된다.

양우조는 "상해에서 시작된 임시 정부는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점차 정세가 불리해지자 중국 정부가 자리하던 남경 근처의 진강으로, 얼마 후 다시 지금의 장사로 자리를 옮겼다"고 썼다. 또 1938년 7월22일 광둥성 광주로, 두 달 후 광둥성 불산에서 제시의 백일을 맞았다. 같은 해 10월20일 짐을 챙겨 장제스의 도움으로 전차 하나를 빌려 타고 삼수로 향했다.

1940년 9월 길고 긴 여정 끝에 새로운 땅 충칭에 도착했다. 임정은 1919년 상해를 시작으로 1932년 항저우, 1935년 진강, 1937년 장사, 1938년 광저우·유저우, 1939년 치장, 1940년 충칭으로 옮겼다. 장강과 가릉강이 만나는 충칭. 해발 100m가 넘는 비탈 비탈마다 건물이 빼곡한 현재의 충칭. 그 때도 장강의 물빛은 누랬을까.

충칭에서 4번의 이전 끝에 임정의 마지막 청사인 연화지 38호에 도착했다. 청소년 역사 원정대의 발길로 고요에 갇힌 임정의 마지막 청사가 깨어났다.

백범 일지에는 "우리 임시정부도 중경을 떠날 때까지 네 번 옮겨 다녔으니 그 고해파란(苦海波瀾)만은 영원히 잊을 수 없다"고 쓰여 있다.

산자락을 깎은 듯 도시는 구불구불 산길 위에 위태롭게 서 있고, 그 한가운데 사방이 오래된 아파트로 막힌 곳에 충칭의 마지막 임정 청사가 자리해 있다. 청소년 역사 원정대는 곳곳을 둘러보며 임정 요인의 숨결을 느끼려 애썼다.

임정 여정의 마지막은 한국광복군 청사를 찾는 것이다.

며칠 전 한국광복군 청사 복원 기념식이 열려 가벼운 마음으로 찾았지만, 아직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다. 중국이 당-군-정의 순으로 국가를 세웠다면, 임정은 정부(임정), 당(한국독립당)에 이어 마지막 한국광복군이 설립됐다. 누군 얘기한다.

일제의 수십만 대군에 비해 초라한 한국광복군의 모습을. 그러나 한국광복군이 있었기에 한민족 독립의지는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세계는 임정을 인정했다.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
"어리석은 자만이 직접 경험해봐야 배울 수 있다고 믿는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 말이다. 그렇기에 "현명한 자는 역사에서 배운다"고 했다. 반만년 역사는 단기 2333년 시작된다. 그 세월동안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시련이 있었으랴. 그 중 일제치하 35년은 민족의 정통성이 끊겨버린 역사의 단절 시기였다.

엄혹한 시절 임에도 독립 의지를 세운 우리 선열들,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 해방과 '환국' 속 민족이 분단되고, 임정 요인 상당수는 '빨갱이'로 몰렸다. 일제 때도 겪지 못한 수모를 친일파의 손아귀에 빠진 조국에서 겪은 약산 김원봉. 김구는 흉탄에 생을 마감했다. 아직 청산되지 못한 일제 강점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말도 안 되는 역사적 외설로 임정을 부정하고, 광복군을 무시하며, 임정 요인을 매도한다.

역사는 묵묵히 지켜본다. 다음세대는 지금 우리의 잘못된 행위를 기록할 것이다. 다시는 우리 민족에게 이런 수모를 겪지 않도록.

그렇기에 지난 4월6일부터 4월11일까지 5박6일간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3만리 발자취를 따라서' 청소년 역사 원정대 13명의 이 길은 인천을 넘어 모두가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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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인생에 너무 보람찬 기회"
#충칭에서 만난 두 청년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지 진열관에서 대한민국의 건장한 두 청년을 만났다. 이 곳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박서우(24·사천외대 4년), 박종휘(23·경북대 3년)씨가 그들이다. 박서우씨는 고교 졸업 후 이 곳으로 대학을 왔다. 박종휘씨는 교환학생으로 충칭대에서 공부 중이다. 이들은 왜 바쁜 유학생활 시간을 쪼개 이 곳에서 봉사하게 됐을까.

"대한민국 청년이라면 당연한 것 아닌가요." 되묻는 그들, 우문 속 현답이다. 그들은 "이 곳을 찾는 우리 국민들에게 조금이라도 깊게 설명해드릴 수 있고, 그러한 봉사 속에서 보람을 느낀다"며 "충칭 임정 청사에서 봉사할 수 있는 기회는 제 인생에 너무 값지고 보람차다"고 밝혔다.

/이주영 기자 leejy96@incheonilbo.com